유치원 아이들의 졸업 공연에 부쳐
객석의 가치
박수를 치다보면 박수를 치는 팔자보다 받는 팔자가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주목과 칭찬을 받는 삶이란 얼마나 멋질까. 공연을 처음 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것이 연주회건 연극이건 간에 이해하기 쉽지 않았고 해내기 어려워보였다. 공연에 대한 첫 박수는 아마도 학습된 것이리라. 지금이 박수 칠 타이밍이야, 힘껏 쳐, 그것이 무대 위의 연행자에 대한 예의란다. 그러니 박수를 받는 팔자가 더 좋겠다고 생각한 건 단순히 무대 위의 사람들이 박수 받는 모습이 부러워서는 아니었다. 종종 진심이 담기기는 하지만 으레 이런 박수는 사회적인 인사 같은 것이니까. 박수 치는 게 수고로워 치느니 받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박수를 위해 무대에 흘린 피땀을 생각하면 박수를 받는 입장이라는 게 꼭 수지타산이 맞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무대 위 사람이 더 적극적으로 열렬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다. 나는 무료하게 앉아서 보고 듣기만 하는데,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연기하거나 노래하거나 연주한다. 그 위에서는 도대체 어떤 격렬한 감정이 들까. 삶에 대한 호기심이 치켜든다. 그보다 더 격렬한 삶은 있을 수 없을 성 싶다. 그래서 가끔은 바뀐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그들이 그토록 격렬히 살아내는 모습을 누군가 봐주기 때문에 무대가 의미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객석에 앉은 우리가 그들로부터 돈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러니 부러움의 요체는 박수에 있다기 보다는 그 삶 자체에 있었다. 그런 의미과 기술을 연마해서 최고의 상태로 선보이는 삶.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할 고양된 감정. 숨 죽이며 지켜보고 박수로 화답하는 사람들. 최고의 삶 아닌가.
그런데 어른들은 무대 위의 삶에 박수는 보내도, 자신의 삶으로 들여오겠다는 어린 사람들의 포부에는 우려와 반대를 표하곤 했다. 아니 그토록 제대로 살 수 있는 삶이 어디 있다고? 결국 무대에서 박수받는 사람이 아닌 객석에서 박수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낫다는 말일까. 물론 직업 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가장 큰 부분이었겠지만, 박수를 받느냐 치느냐로 삶을 구분해놓고 나면 박수를 치는 삶은 박수를 받는 삶보다는 시시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성장할수록 객석에서의 감식안과 감동도 조금씩 커져가니, 저걸 직접 해내는 사람들의 이해의 폭과 감정의 폭은 얼마나 넓고 깊을까.
그런데 직접 연행을 하고 보면, 그게 그렇지가 않다. 연주는 치는 사람의 감정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감정에 복무한다. 연기는 더욱. 무대가 나서서 먼저 울어버리면 관객은 울지 못하고, 먼저 웃어버리면 관객은 웃지 못한다. 무대 위에 제련된 기술적 리듬과 조화를 생성해 놓으면 관객이 비로소 느끼는 것이다. 관객은 자신이 그렇게 느꼈으니 연행자는 더욱 큰 진폭의 감동 속에 있으리라 예상하지만, 연행자가 느끼는 감정은 객석과는 종류가 다르다. 훈련으로 비롯된 기술적 성취에 대한 만족감, 혹은 실수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가깝달까. 물론 그 성취와 안도도 남달리 큰 기쁨일 것은 분명하지만.
어쩌면 객석의 사람은 무대 위를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을 보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 무대를 봄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새롭게 발견한다. 무대 위의 서사와 기예에 따라 감정이 통과하고 있는 자신을 안전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느낀다. 격렬하고 슬프고 무서운 감정 모두를 포함하여. 그러니 우리는 기쁘게 박수를 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기회를 줘서 고맙기에. 그렇기에 세상은 박수 받는 사람과 박수 치는 사람의 우열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의 헌신적 성취를 바탕으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다시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실과 감사를 주고 받는 관계. 성실의 결과를 누리고 감사를 표하는 관계.
이처럼 객석의 가치를 다시 되새기게 된 건 얼토당토 않게 아이의 유치원 졸업공연을 보러간 자리에서 였다. 심지어 내 아이도 아니라 다른 아이들이 만드는 오프닝 연주 장면에서, 아이들이 최선으로 악기의 화음을 맞추는 모습에서 미리 감정이 터져버렸다. 저 아이들의 순수한 몰입의 시간이 느껴져서. 그리고 저 아이들과 같이 몰입과 훈련의 시간을 가졌을 내 아이와, 그 시간을 끌어내려 애썼을 선생님들의 노고가 느껴져서. 나의 유년 시절의 감정이 다시 떠올라서. 첫 무대에서 마음이 휘몰아치고 나니 정작 내 아이의 무대는 오히려 담담하고 기쁘게 즐길 수 있었다. 이런 뭉클함을 어디에서 다시 느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뭉클함은 저 아이들이 느끼는 긴장감과는 또 얼마나 다른 것인가. 그날 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힘껏 박수를 치고,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객석은 역동적이고 행복한 마음의 곳이었던 것이다.
PS. 그리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연출이란 객석의 존재인가 무대의 존재인가. 이런 박쥐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