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육체미 대소동의 재미를 위해서
난 피지컬 아시아가 왜 재밌을까.
1. 피지컬 아시아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아무래도 몽골이 응원하는 맛이 난다.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잘 보지 못한 국가라 신선하기도 하거니와, 선수들의 개성이 강렬하면서 감동도 있다. 언더독 이미지이지만 우승까지 넘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다른 국가들이 스포츠 과학과 자본의 수혜를 어느 정도 받은 느낌의 멀끔함이 있다면 몽골은 보다 야성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건 그들을 드러내는 연출의 의도이기도 한 것 같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다시피, ‘전사여 말에 올라라’라는 구호와 함께 활시위를 당기는 팀 응원 모션과 연출로 깔리는 매 소리는 마치 잃어버린 야성의 들판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2. 선수들의 근사한 육체와 움직임, 안간힘을 만끽하다 문득 레니 리펜슈탈이 떠올랐다.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를 통해 인간의 육체를 설레고 아름답게 찍어낸 영화감독이지만 나치에 부역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던 영화감독. 수잔 손탁은 리펜슈탈에 대해 파시스트의 미학이라 비판했고 레니 리펜슈탈은 주어진 소재를 근사하게 표현했을 뿐이라 반박한다. 리펜슈탈은 아프리카 부족 속으로 들어가 찍어낸 화보집 ‘누바’로 복권되고자 했지만 이 역시 파시스트 미학이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한다. 자본과 권력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영화 소재에 대해 여성 감독으로서 영화적 미학을 세운 사람으로 리펜슈탈을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여성이기에 오히려 권력으로부터 더 유리한 기회를 얻어 파시즘에 복무한 비윤리적 예술가로 그녀를 판단해야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설득해 낸 작업의 ‘매력’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올림피아>는 스포츠 촬영의 교본처럼 퍼져나간 걸까.
기본적으로 그녀의 영화는 당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선전 영화였다. 이를 위해 기획, 제작되었다.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은 이런 판단 기준에서 비껴 나 있다. 이 프로그램들이 복무하는 것은 대중의 즐거움이다. 그렇기에 이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윤리적 미학적 기준을 고민하는 일은 좀 멋쩍고 번지수를 잘못 찾은 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고민할만한 주제들이 드러난다. 스포츠에서 제외되는 지점들을 과감히 차용하는 것이 이 프로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피지컬 예능’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올핌픽이나 스포츠 종목이 줄 수 없는 쾌감을 주어야만 프로그램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성별 구분을 없애보자. 체급별 구분도 하지 말자. 도핑 검사도 없다. 온갖 종목을 다 경쟁시키되, 사전에 게임을 알고 대비할 수 없게 하자. 개인전과 팀전을 번갈아가며 넣어보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으로, 캐릭터를 더욱 재미있게 살리자. 인터뷰와 미션 촬영을 통해서.
3. 이렇게 생각하면 <피지컬 100>은 한국에서 시작했기에 성공하기에 유리했다. 독일에서 <피지컬 100>을 처음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자. ‘완벽한 피지컬에 대한 탐구’라는 주제문을 발표하자마자 돌아온 우생학이라는 돌을 맞았을 확률이 높다. 미국에서 시작했다면 어떨까. 인종 대결과 인종주의의 늪으로 빠져버렸을 위험이 있다. 반면 동아시아 인종은 피지컬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인상이 있다. 그런데 그 인상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피지컬 예능을 <오징어 게임>의 기시감에 올라타서 데스게임 형식으로 펼친다는 것이 <피지컬 100>의 성공요소였다.
하지만 무차별 경쟁 프로그램을 ‘공정’하게 운영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피지컬 100> 시리즈는 여성 참가자를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지 늘 애를 먹는 것으로 보인다. 여자 대 여자 대결이나 ’ 규격 외‘ 여성 선수에 대한 주목을 한다 하더라도 여성 참가자가 힘을 발휘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이 예능들은 남자들의 경쟁으로 빠르게 좁혀진다. 팀전이 된다면 여성 선수의 존재는 단점이 되고, 그 단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전략이 된다. 아쉬운 일이다.
그래도 남녀를 다 참여시키는 건 이해가 된다. 스포츠와는 달라야 하니까. 서로 간의 움직임과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다른 재미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에서 여성 우승자가 나올 수 있을까. 만일 게임 선정의 유리함을 타고 여성이 우승하게끔 프로그램이 진행된다고 해도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남녀불문 무차별 피지컬 경쟁인데 여성이 우승할 수 있게끔 의도적으로 흐름을 조율한 것으로 느껴지기 쉬울 테니. 이래저래 여성 출연자가 갈 수 있는 한계가 명확하다.
4. 그리고 인종. <피지컬 100>에서 한국인이 아닌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이 우승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는 훨씬 가능성이 높은 일이다. 개인의 탁월함이 우승까지 이르게 할 수 있으니. 그런데 이 수많은 아시아인들 제치고 백인 남성이 우승한다면? 혹은 흑인 남성이 우승한다면? 더 나아가 백인 여성이 우승한다면? 혹은 흑인 여성이 우승한다면? 인종별 피지컬 우열 논란이 번지기에 너무 좋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누가 봐도 약물 사용의 흔적이 역력한 참가자가 우승한다면? 아무리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 완벽한 피지컬의 탐구‘에 대한 대답이 ’ 약물 사용’이라면 이건 위험하다. 뛰어난 기량과 노력이 뒷받침된 참가자라고 해도 약물 사용이 ‘티가 나는’ 참가자가 우승하는 일은 없어야 예능을 예능으로 받아들이기에 좋다.
5. <피지컬 아시아>는 어떨까. 국가대항전의 모습을 띠면서 <피지컬 100>보다 올림픽의 모양새에 한층 다가선다. 국가 별 팀 응원이 되면서 전쟁의 이미지가 보다 적극적으로 차용되어 액션 영화를 넘어 전쟁 영화를 보는 듯한 흥분감을 유도한다. 여성의 활약이 보장되기는 여전히 쉽지 않지만 그래도 참가자의 매력은 비교적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부분은 인종이다. 아시아로 한정했지만 튀르키예와 호주가 참여함으로써 일반적으로 유럽 백인, 미국 백인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대거 들어왔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근력이나 체구에서 우세한 모습을 보이면서 인종적 차이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한다. 이 생각이 깊어지면 위험하다. <피지컬 아시아>에서 그 두 개 국가가 우승한다면 아시아라는 분류에 무색하게 인종 간 피지컬 우열에 대한 위험한 담론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할 수 있고 해도 된다. 이후를 예상해보는 것이다).
또 약물 사용자로 생각되는 참가자가 많은 국가가 우승하는 것도 위험하다. 이는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서 더욱 예민할 수 있다. 프로그램이 희화화되기 딱 좋다. 결국은 인종 혹은 약물로 결론이 나면, 나름 공정하려고 애쓴 경쟁이 다른 담론에 휩쓸려가며 재미 또한 약해질 우려가 있다.
6. 공정성과 조작 금지는 이런 경쟁 기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있어 생명과도 같다. 제작진은 참가자와 시청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경쟁의 룰을 제시하고 그 룰 안에서의 최선을 최대한 자극적으로 재미있게 편집해서 내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파시즘의 미학‘에 경도되어 보일 여지를 줄여야 할 테다. 진지하게 비판받을 여지를 줄여야 할 테다. 여성, 인종, 약물에 대한 태도가 그 핵심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부분에 대한 나름의 교통 정리가 있어야 근육의 꿈틀거림과 거칠게 내쉬는 숨소리와 흐르는 땀방울이 뽐내는 생기를 더욱 즐길 수 있게 된다.
7. 그런데 이러한 즐김을 넘어 밑도 끝도 없이 눈물이 난 순간이 있었다. 먼저, 김민재 장은실의 장승 버티기에서의 ’ 애국가‘. 고통스럽게 장승을 버티던 씨름의 김민재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얼굴을 하다 나직이 애국가를 중얼거린다. 고통을 잊기 위해 인에 박힌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건 흔한 일이고,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인이 박힌 ‘ 지점 때문에 애국가는 종종 이런 맥락에 소환되고는 한다. 그런데 신체의 고통과 의지가 애국가와 결합될 때는 그 느낌이 좀 다르다. 자신이 버티고 있는 힘과 의지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피의 결속의 일환이라는 환상, 혹은 믿음이 보다 힘을 주는 것이다. 애국가의 소환에 눈물이 나는 것은 그 믿음을 긍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믿음이라도 끌어와야 하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상상의 공동체에 기대어 혼자가 아님을 상기해야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또 다른 순간은 매달리기에 나선 튀르키에 선수가 고통을 잊기 위해 읊조린 말이었다. ’ 어머니, 저는 적을 향해 갑니다...‘ 그가 임하는 것은 예능프로그램의 경쟁 퀘스트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기에, 그는 이를 이겨내기 위해 전쟁터에 임하는 병사의 마음을 소환한다. 얼마나 많은 인간이 전쟁터에서 무기를 들고 적을 향해 전진하며 고향의 어머니와 가족을 떠올렸을까. 다음 순간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그 죽음이 의미를 갖기를 기원하며. 우리는 왜 극한의 순간에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될까. 가족과 국가, 혼자가 아님을 떠올려야만 버텨지는 인간이라는 존재.
개인의 피지컬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업이자 취미이자 삶의 핵심으로 삼는 사람들이 극한의 순간에 떠올려야 하는 것이 혼자가 아님을 상기하는 것이라는 걸 목격한 것이 내겐 가장 흥미롭고 울컥했다.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해야만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의미를 발명해야만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그래서 우승은 어느 나라의 것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