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의 이야기
서점이라는 곳은 그다지 유쾌한 공간은 아니었다.
항상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문제집을 고르러 갔던 그곳은
내가 읽고 공부하고 풀어야 하는 숙제들만 잔뜩 인 곳이었다.
중 1 때 아빠와 단 둘이 서점을 갔다가
어려운 문제집만 사 와서 마음의 짐도 같이 사 왔던 불편한 기억이 있다.
분명히 돈 주고 산 건데, 내 마음도 팔린듯한 기분은 심히 불쾌했다.
나에게 서점의 분위기를 환기시켜준 건 사랑을 알고,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 서다.
예쁜 편지지에 편지를 써야 받아주는 상대방이 더 좋아할 거라는 배려.
글씨가 잘 써지는 펜을 사야 하고, 편지봉투와 귀여운 스티커가 모여있는 곳.
아쉽게도 문제집을 안 살 수는 없었지만, 아기자기한 펜시들이 나를 기다리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 혼자 문제집을 산다며 엄카를 받아 이것저것 샀던 추억이 기분 좋은 곳이다.
<로빈슨 크루소와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만화책을 보면서 스토리를 알아가던 중2병 걸린 나에게 느릿느릿한 소설책은 꼰대 느낌이었다.
처음 끝까지 정독한 책은 로빈슨 크루소였는데,
너무 재밌어서 수업시간에도 교과서 사이에 몰래 끼워서 읽고 그날 하루 수업은 통째로 안 들었다.
하지만 그 희열은 정규 교육과정에서 알려주지 않은 감정이었고,
너무 뿌듯해서 친구들, 부모님, 누나에게 자랑하고 다녔다.
남들보다 늦게 느낀 감정이 아쉬워서 지나간 책(?), 다른 친구들은 이미 읽었던 책들을 돌이켜보니
톰 소여의 모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등이 있었고, 그 해에 유명한 세계문학들은 대부분 읽었다.
하지만 운동이 더 좋았던 시절과 수험생을 거치며 책에서 손을 놓았고, 수능시험을 치르고 다시 서점에 갔다.
신기하게 그 당시 서점이 엄청 좋아졌다. 서점의 기업화, 대기업들이 문화컨텐츠를 서점에서 같이 팔았는데 교보문고, 반디앤루니스, 영풍문고 등이 날 행복하게 했다.
안타깝게도 대기업의 진출로 동네의 소소한 서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행복했지만, 또 한 명의 노동자로서 불편했다.
아, 어쨌든 그때 샀던 책은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였다.
빠리였는지, 파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에 친구들 사이에서 더 유명한 책은 한비야의 '지도밖으로 행군하라'였지만,
난 이상하게도 그 옆에 진열되어 있는 그 책을 샀다.
행운이었다.
너무 많은 부분에서 나에게 영감을 준 책이었다.
전쟁 이후 베이비붐 세대의 삶과 시련, 아버지 세대들의 노력, 똘레랑스,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정당성이 없는 국가, 사회의 정의,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방법 등
너무 많은 것을 일깨워줘서 더 이상 이런 책을 만나보지 못할 것 같아 무서울 정도였다.
덕분에 아직도 10년 전에 읽은 그 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서 이후에 읽었던 책들은 대부분이 박노자, 복거일, 진중권, 유시민 등의 작가 분들이 쓴
정치적 성향이 두드러지는 책들이었다.
오늘은 모처럼의 휴일이라서 서점에 왔다.
교보문고에는 35주년을 자축하는 피오피를 세워놨다.
서점을 둘러보면서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들을 하나하나 기억해본다.
또 그런 책들이 있을 거란 기대를 하면서 한 권 골라잡는다.
다음에 서점에 오면 꼭 이 책을 기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