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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14. 2024

김화진 <동경>


결정하지 못한 상태로 인해 초조해지는 날들이었다. 스스로를 위해 선택하는 일은 괴로운 것이구나. 선택받을 때보다 더. 그 어느 때보다 들썩이는 마음을 잠재우려고 애쓰다가 문득 책점 생각이 났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언젠가 해든이 알려준 것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자주 읽는 책이 꽂힌 책장으로 가서 눈을 감고 한 권을 골라 고민을 떠올리며 무작위로 책을 펼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을 읽어. 그게 너의 운세야. 
나도 내 마음을, 말로 꺼내 놓고야 알 수 있었다. 이제야 혼자 힘으로 해낸 것이 있는데, 그걸 걷어차고 또 다른 곳으로 탈주하려는 마음이 스스로도 버거웠던 것이다. 뭔가를 좋아하고 또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렇게나 무겁구나. 그럴 수도 있구나. 그런 마음이 나를 짓눌러 아침마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이마저 변명 같지만. 하던 일이나 잘하지,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고 남들도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그런 나를 선배가 꿰뚫어 보고 미워할 것 같았다. 아름이 성실하고 괜찮은 앤 줄 알았는데 실망이네, 하고 점점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책을 읽기 전에 가장 먼저 가졌던 의문이자,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가졌던 의문. 제목이 '동경'인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다 읽으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다 읽고 나서도 잘 모르겠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동경(憧憬)'을 찾아보면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여 그것만을 생각함' 또는 '마음이 스스로 들떠서 안정되지 아니함'이라고 나와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등장인물들이 그렇게 간절히 그리워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제목에 대한 답이 될 것 같다.


작품에 나온 아름, 민아, 해든 등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성격을 갖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장점으로 보일만한 부분과 동시에 스스로는 콤플렉스 혹은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각 인물들이 모두 그러한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은 자칫 캐릭터를 너무 단조롭게 보일 수 있는 위험성도 있다. 모두가 이중적이라는 것은 결국 전체가 같은 쪽으로 동화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자기장 내 자석이 같은 방향을 향하게 되는 것과 유사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극성은 각각의 인물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아무래도 타인에 대해서는 자신이 갖지 못한 면에 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세 사람 각각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세 사람 모두 우리가 셋이라는 사실을 더없이 잘 알고 있어서, 가끔 둘이고 자주 둘이고 영원히 혼자이지만 우리는 셋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관계가 된 게 좋았다. 언제나 곁눈질을 하던 관계에서 드디어 셋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순간이 온 것이 좋았고 셋이서 오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었음을 알고 있는 상태가 좋았다. 민아와 해든과 아름은 처음으로 똑같은 생각을 했다. 셋 중에 자신을 뺀 나머지 둘을 두고 어느 날은 누가 좀 더 좋고, 어느 날은 누가 좀 싫대도, 결국에는 둘 다 좋은 것이 좋다는 생각. 누구도 이탈하지 않은 채로 그렇게 유지되는 삼각형의 마음이 안전하다는 생각. 이 여행과 이 시간은 셋이어서 특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자신을 뺀 나머지 둘도 언제나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믿었다. 
그들이 이루는 삼각형은 각자가 선 자리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두 점이 유독 가깝고 한 점이 비교적 멀 때는 그 모양이 변했으나, 삼각형은 삼각형이었다. 아닌 적은 없었다. 
서로가 선과 선으로 면과 면으로, 각자가 하나의 칸이 되어 기대거나 붙은 채로, 몇 년간 유지되어 오던 큐브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처음 돌아간 것은 당연하게도 민아의 제안을 아름이 받아들이고 해든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여섯 면이 제 색을 찾기 이전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우리는 여전히 재배치되고 옮겨갈 수 있는 칸에서 있었던 것이다. 색은 섞여 있었고 무슨 색의 어느 칸이 어떤 방향으로 돌아가느냐에 따라 다른 색들의 위치와 배합도 달라졌다. 그것이 우리의 관계 같았다. 완전한 하나의 색으로 모아질지 섞인 채로 멈출지 이번에도 알 수 없었다. 


김화진 작가는 이를 삼각형의 세 꼭짓점에 놓인 것처럼 묘사하고 싶었겠지만, 그보다는 그냥 서로 나란히 놓인 자석처럼 느껴진 건 그 세 사람이 이루는 형태가 삼각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사람의 관계에 너무 초점을 맞추기보다 개개인에 대해 관찰해 보면 (작가는 마치 관찰하듯 각각의 인물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각각의 인물에 대해 좀 더 잘 알 수 있게 되고 애정을 갖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1부에서 각 인물에 대해서 계절과, 부제를 붙여가며 그렇게 묘사하였을 것이다. 이 부분은 마치 연작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전작인 <공룡의 이동 경로>에서 보았던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작품은 결국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여름부터 시작해 추운 겨울에서 전환이 이루어지고, 다시 여름으로 향한다. 물론 계절에 대한 비유를 들어 그렇게 구성했지만 사실은 몇 년 간의 이야기다. 그리고 내용 역시 계절과 완전히 대응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계절이 갖는 상징성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희망'을 일깨워 준다. 계절이 반복될 것이라는 희망. 이것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희망이기도 하고, '더 좋은 날이 오리라'는 희망이기도 하다. 


나보다 타인을 더 걱정하는 마음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 마음이 아파지는 것을 못 견뎌하는 마음? 네가 아프면 내가 괴로우니 아프지 말아 달라는 이기적인 마음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큰 불행은 타인에게 가는 것이고 나에게는 그보다 작은 불행만 올 것이라 자만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이 사랑인 건지, 잠깐 생각해 봤으나 알 수 없었다. 너무 어려웠다, 그런 건. 함부로 할 수 있다고 말하기엔 너무 커다래서 잡히지 않았다. 열광과 몰입 외에 무엇이 사랑일까. 질투와 소유욕 외에 조급함과 뜨거움 외에 사랑이 뭘까. 그 외의 사랑이 나에게 있을까? 나는 자주 의심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처럼, 일로 만나 서로 친구가 되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우정일까? 그러한 것이 우정이라면 그것을 지속해 나갈 수 있을까? 나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인지, 혹은 그보다는 이제 사회생활을 더 많이 했고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것에 대해서 막연히 희망적이진 않다. 하지만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한 희망이 있어야 세상이 좀 더 살만하지 않을까?


또한 이 작품 속 그들의 이야기는 크고 작게, 독자들에게 공감을 갖게 할 수도 있다. 특별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살면서 고민해 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공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는 건 그 작품을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그리고 다 읽고 나면 누군가, 자신처럼 그렇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갖고 있다는, 간접적인 위로를 갖게 할 것이다. 그것이 이러한 작품들이 갖는 미덕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동경'은 무엇에 대한 동경인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완전함'에 대한 동경이 아닐까 싶다. 더 솔직하게는 '완전함'에 대한 강박이 아닐까. 


어른이 되어, 어른다워야 한다는 강박. 그래야 한다는 것인지, 그러고 싶다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이 모두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 같은 삶. 나만 뒤떨어져 있는 것 같은 두려움, 그리고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다른 이들은 갖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 그러한 두려움과 혼란이 없는 상태. 그것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것은 각자의 마음에 담겨 있다. 김화진 작가는 마음의 탐구에 강점을 갖는다. 이는 그가 초기부터 꾸준히 보여준 면이다. 하지만 단편을 넘어서기에는 아직 좀 무리인 것일까?


<동경>은 그의 첫 장편이라는 타이틀을 달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장편이라기에는 아직 부족해 보인다. 단편의 모음, 혹은 연작 소설의 연장선. 그런 느낌에 가깝다. 그는 자신이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바탕으로 장편을 써보고자 했지만 그게 오히려 제한 요소가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의 작품이 점점 더 발전해 나가고 있으니, 조만간 또 다른 형태의 장편도 발표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가 써낼 또 다른 장편은 어떤 이야기일지 기다려진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나 이 사람 팬이야. 린드그렌이 삐삐 롱스타킹처럼 살았을 거 같아? 반은 비슷해도 나머지 반은 아닐걸. 너무너무 힘들고 외로웠을걸.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그걸 남기는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해. 난 린드그렌이 아니지만 힘들 때마다 그 사람이 갔던 길을 생각해. 너도 힘들 때마다 누군가를 떠올려봐. 꽤 좋을지도 몰라. 
아무래도 슬픔은 고체다. 내가 제일 많이 떠올리는 형태는 어릴 적 봤던 바이올린 활에 바르는 송진덩어리다. 슬픔은 마음 한구석에 송진 같은 고체 형태로 존재하다가 어떤 녹는점에서 녹아 흐른다. 액체가 되어 온몸으로 퍼지기도 하고 자칫하면 눈물이 되어 쏟아지기도 한다. 슬픔의 녹는점은 누군가의 한마디나체온, 혹은 해질녘의 버스정류장이나 혼자 멍하니 보내는 주말의 긴긴 낮일 수도 있다. 
가끔 약에도 체해. 그럴 때 있잖아. 선의에도 걸려 넘어지잖아. 그런 걸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어. 우린 겨우 서른 언저리잖아. 선문답처럼, 성긴 그물을 던지듯 에두른 해든의 문장들은 잘 드는 연고 같을 때가 있었다. 세상에 나를 설명하려고 너무 애쓰다가 지레 헛구역질이 날 것 같을 때 해든은 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너 겁이 많구나, 하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누군들 겁이 없겠어. 아름은 두려움을 털어놓는데 제법 솔직한 편이었다. 민아언니는 털어놓지 않았지만 언니를 보고 있자면 어렴풋하게 언니의 두려움이 보였다. 언니는 주인 의식도 있고 장인 정신도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도 그랬다. 그런 점에서 아름과 언니는 충분히 비슷해 보였다. 나로 말하자면, 장인이고 주인이고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되는 대로 했고 그게 맞다고 믿었다. 그래서 내가 둘을 처음 봤을 때 나와는 맞지 않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름, 재능은 그런 한 단어가 아니고 그 속에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포함된 단어인데, 네가 만난 사람들과 네가 다한 열심도 거기 들어가.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인가에 실패했다 해도 재능이 없는 게 아니야. 네가 바라는 성공에 필요한 재능이 없는 거지. 다른 여러 재능은 있을 거야. 그래서 재능은 항상 사후적일 거야. 되고 나야 그런 저런 재능이 있었군, 하고 평가할 수 있거든. 
폐허는 우연이 만들어낸 미학적 결과물이다. 그것을 일부러 아름답게 만들 수는 없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폐허를 만들지 않으며, 관리하지도 않는다. 폐허는 밑으로, 그리고 무더기에 가까워진다. 가장 멋진 것은 무너진 이후에도 여전히 서 있는 것들이다. 
봄은 생각보다 따뜻하지 않고 생각보다 흐리다. 온통 먼지에 둘러싸여 있는 감각이 봄의 시작이었다. 분홍꽃잎만으로 봄을 기억하게 되는 게 신기할 정도로 꽃이 피기 전 봄은 뿌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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