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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Jul 30. 2024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중 세 번째로 읽게 된 책이다. 이 단편집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북클럽 문학동네 7기 웰컴 도서로 신청해 받았고, 그 후에도 몇 달간 읽지 않았다. '조만간 읽어야지' 하면서도 쉽게 손이 가지 않았던 이유는 이전에 읽었던 그의 작품이 주었던 모호한 경험과 감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독파 챌린지로 이 책이 올라왔으니, 더 이상 미룰 수 없겠다 싶었다.


카버의 작품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다. 처음에는 그의 유명세가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지만, 그의 스타일이 점점 불편하게 느껴졌다. 왜일까?


카버는 1960~1970년대 미국 노동자들의 삶을 리얼하게 그려낸 작품들로 명성을 얻었다. 단편집 <대성당>과 그 안의 단편들은 그를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한 작품들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도 다른 작품들과 비슷하다. 아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카버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으니까.


버드와 올라의 집에서 보낸 그날 저녁은 특별했다. 특별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내 인생이 여러모로 썩 괜찮다고 느꼈다. 내가 느낀 걸 프랜에게 말하고 싶어서라도 나는 어서 둘만 있고 싶었다. 그 저녁에 내게는 소원 하나가 생겼다. 식탁에 앉아서 나는 잠시 두 눈을 감고 열심히 생각했다. 소원이란 그날 저녁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것, 혹은 다시 말해 그날 저녁을 놓아버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소원은 실제로 이뤄졌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내게는 불행이었다. 하지만, 물론, 당시에는 그걸 알 도리가 없었다.
 
<깃털들> 중에서
나는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부르기 쉬운 이름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 이름을 불러왔다. 나는 한번 더 이름을 불러봤다. 이번에는 소리 내어 불렀다. 웨스,라고 내가 말했다. 그가 눈을 떴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는 그대로 가만히 앉아서 창문을 바라봤다. 뚱땡이 린다,라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그녀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무의미했다. 그저 이름일 뿐, 웨스는 일어나 커튼을 쳤고 바다는 그렇게 사라졌다. 나는 저녁을 준비하러 갔다. 아이스박스에는 아직 물고기가 몇 마리 남아 있었다. 다른 건 별로 없었다. 오늘밤에 다 먹어치워야겠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게 마지막이 될 것 같다고.

 <셰프의 집> 중에서


이 책에는 총 열두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한 편당 평균 25페이지 정도로 읽기에 큰 부담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량이 적다고 해서 담긴 내용이 적은 것은 아니니까. 카버는 많은 이야기를 압축하여 담았다. 과장되지 않게 드러내는 그의 함축성이 돋보인다.


그의 작품은 결말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갑작스럽게 끝나 당황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독자에게 수수께끼를 던진다. 이는 '열린 결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독자에게 그 이후의 일을 상상하게 만든다. 결말이 주어졌다면 카버의 작품에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작가로서 책임 회피가 아니라 그의 계산된 노림수다. 게다가 미래는 어차피 불확실하다.


카버의 작품들은 거창하지 않다. 등장인물들은 소심하고 찌질하며,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전형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그런 사람들은 있고, 나도 그렇다. 그들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격렬하지 않더라도 상당한 심적 갈등을 유발한다.


대체로는 관계에 대한 갈등이 많으며, 이는 상황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슬픔, 후회, 불안, 혼란, 소외 등이 잇따른다. 이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마치 내 이야기 혹은 술자리에서 주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종류의 기다림이라는 상황에 처한 이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도 두려웠고, 그들도 두려웠다. 다들 그런 공통점이 있었다. 그녀는 그 사고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다. 스코티가 어떤 아이였는지 그들에게 더 얘기하고, 또 사고가 월요일, 그러니까 그 애의 생일에 일어났다는 것을, 그런데 그 애는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더 말하지 못한 채 그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중에서
바로 그때, 창가에 서 있을 때, 그는 그렇게 뭔가가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일린과 관계된 이전의 삶과 관계된 그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 적이 있었던가? 물론 그랬을 것이다. 그랬다는 것을 안다. 비록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하지만 그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이해했고 그녀를 보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들이 함께한 인생이 자신이 말한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인생은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지나침은 비록 -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맞서 싸우기까지 했지만-이제 그의 일부가 됐다.

<열> 중에서
"굴레"라고 나는 말한다. 나는 그걸 창 쪽으로 들고 가 밝은 빛에서 바라본다. 멋질 수가 없는, 검은 가죽의 낡은 말굴레일 뿐이다. 내가 아는 바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거기에 말의 입에 물리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안다. 그 부분을 재갈이라고 부른다. 강철로 만들었다. 말의 머리 뒤로 고삐를 넘겨 목 부위에서 손가락에 낀다. 말에 탄 사람이 그 고삐를 이리저리 잡아당기면 말은 방향을 바꾼다. 간단하다. 재갈은 무겁고 차갑다. 이빨 사이에 이런 걸 차게 된다면 금방 많은 것을 알게 되리라. 재갈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 때가 바로 그때라는 걸. 지금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걸.

<굴레> 중에서


카버는 이를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유머로 버무린다. 마치 쓴 약의 겉면에 당을 입힌 것처럼. 그러한 상황과 감정의 부조리가 카버의 소설 전반에 맴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이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알면서도 우리는 그의 작품을 삼킨다. 


게다가 작품 속에서 어떤 얘기를 하려는지 명확하지 않은 것들도 있다. 이는 카버만의 스타일이 아니라 단편 작가들이 대체로 그렇기 때문에 이해한다. 단편 소설에서만 시도할 수 있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묘한 일이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불편한 감정을 느꼈으면서도 또 읽게 된다. 이미 익숙해진 것일까? 책을 다 읽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 내용들이 떠오른다. 어떤 단편이 가장 좋았을까 생각해 보니 더 그렇다. 그래, 어떤 작품이 가장 좋았지? 한 편씩 곱씹어 생각해 보면 다 괜찮았던 것 같다.


그래서 벌써 세 번째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번이 그의 작품을 읽는 마지막일지도 모르지만, (이젠 더 이상 새로 나올 이야기가 없으니까) 앞서 읽었던 책들과 이 책도 나중에 다시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여담이지만 이 책의 번역은 김연수 작가가 맡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여서 기대했지만, 번역은 좀 아쉬웠다. 작가로서 작품을 쓰는 것과 번역은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해낸 것 같아." 그는 말했다.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렇게 눈은 감은 채로 있자고 나는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 그가 물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대성당>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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