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박물관에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1483-1520)'가 왜 나오나 싶을 것이다.
에르미타주에 있는 '라파엘로 로지아'는 바티칸에 있는 '라파엘로 로지아'를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이곳에 똑같이 만들어 놓은 회랑이다.
라파엘로 원작의 복제품인 것이다.
바티칸의 '라파엘로 회랑'은 1501년 교황 율리오 2세(Pope Julius II:1443-1513)가 건축가 브라만테(Donato Bramante:1444-1514)와 라파엘로에게 의뢰하여 만든 회랑으로 13개의 아치와 13개의 둥근 천장(vault)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둥근 천장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1519년 완공되었다.
브라만테와 라파엘로의 이름만 들어도 회랑의 모습이 어떨지 설레지 않는가?
여제의 마음도 그랬을 것이다.
'라파엘로의 바이블'이라고도 불릴 만큼 회랑 천장의 프레스코화는 12개의 구약과 1개의 신약의 이야기로 모두 13개의 성경 이야기로 장식되어 있다.
구약(1. 창세기, 2. 아담과 이브, 3. 노아, 4. 아브라함과 롯, 5. 이삭, 6. 야곱, 7. 요셉, 8~9. 모세, 10. 여호수아, 11. 다비드, 12. 솔로몬), 신약(그리스도의 일생: 탄생에서 최후의 만찬까지), 각 섹션마다 4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프레스코화는 모두 52개가 된다.
11번째 천장의 프레스코: 다비드(하단에 골리앗과의 전투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위키미디어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회랑 벽면의 장식화이다.
라파엘로는 회랑의 벽면을 '그로테스크(Grotesques) 스타일'이라 부르는 기법으로 장식해 놓았다.
회랑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그로테스크 그림들
'그로테스크 스타일'이란 새, 꽃, 식물등의 자연과 인간, 동물이 혼합된 특이한 형태의 그림을 말하는데 이 기법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롭다.
로마의 지하에 묻혀 있던 네로 황제의 저택이었던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가 발굴되자 이곳을 직접 탐사한 라파엘로는 거기에 그려진 이상한 그림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곳의 그림을 이탈리아어로 '그로테이스키(grotteschi)'라고 부르면서 '그로테스크 스타일'이 새로운 기법으로 쓰이게 되고 이 기법은 르네상스에 즉각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한다.
라파엘로는 바티칸의 회랑을 이 기법으로 장식해 놓았다.
'도무스 아우레아'에 그려진 벽 장식(위키미디어)
회랑을 장식한 프레스코 화는 라파엘로의 동료(제자란 설도 있다)인 '죠반니 다 우디네(Giovanni da Udine:1487-1564)'가 많은 부분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새와 갈란드(garland) 묘사에 탁월하여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레오 10세의 총애를 받은 화가로 유명하다.
에르미타주 박물관(Hermitage Museum).
18세기 중반, 다른 서구 유럽의 선진 문물을 동경하고 계몽주의에 심취했던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1729-1796)는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왕실의 겨울 궁전(1754-1762 완공)을 자신의 전용 미술관으로 만들어 왕족과 귀족들에게만 입장을 허용했다.
이렇게 시작된 '에르미타주'는 처음에는 선택된 자들만의 공간이었다.
'에르미타주'는 그리스어로 은둔자를 뜻하는 'eremites'에서 유래된 것인데 그 의미가 그들만의 공간인 이곳에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소장품이 점차 늘어나자 1764~1787년 예카테리나 2세는 겨울 궁전 옆에 ‘소 에르미타주(Small Hermitage)’와 ‘구 에르미타주(Old Hermitage)’, 에르미타주 극장을 지어 확장했고, 1852년에는 '라파엘로 회랑'이 자리한 '신 에르미타주(New Hermitage)'가 완공되었다.
19세기 신 에르미타쥬 건물 (그림 오른쪽 건물 옆으로 겨울 운하가 보인다)
왕실 겨울 궁전에서 시작한 여제의 박물관은 5개의 건물을 거느리는 대형 박물관의 위용을 갖추게 되고 19세기말에 와서 에르미타주는 일반에 개방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에르미타쥬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
2013년부터는 박물관 맞은편에 위치한 구 참모본부 건물 중 일부를 현대 미술 전용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앙리 마티스의 '댄스(La Danse,1910)'를 찾아다니다 다른 건물에 있다는 안내를 받고 길 건너 건물로 찾아간 기억이 생생하다.
까딱하면 못 보고 올뻔한 대작이다.
La Musique(좌), La Danse(우)/ 1910년 /에르미타주
현재는 소장품이 270만 점에 이르고 전시장의 총길이가 무려 27km라니 가히 루브르, 대영박물관과 어깨를 견줄만한 박물관이다.
18세기말, 바티칸의 '라파엘로 회랑'의 거대한 복제 프로젝트에 대한 여제의 명을 받은 건축가는 이탈리아 출신 '지아코모 콰렌지(Giacomo Quarenghi :1744-1817)'로1787-1792년 건축을 맡았고 프레스코화 역시 이탈리아 화가인 크리스토퍼 운터버거(Christopher Unterberger:1732-1798) 팀이 동원되었다.
'라파엘로 회랑'은 신 에르미타주 2층에 네바(Neva) 강과 모이카(Moika) 강을 연결하는 겨울 운하(winter canal)를 조망하도록 만들어졌다. 이 운하는 길이 66m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운하들 가운데 가장 짧은 운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제품을 완성시킨 여제는 실제로 바티칸의 회랑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오직 프린트로만 보았을 뿐인데 그 아름다움에 빠져 이렇게 근사한 회랑을 자신의 궁에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은 점령지의 유물을 그대로 가져오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영국 대영 박물관의 Elgin's Marble이나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 Museum) 등 일일이 나열도 힘들 정도로 열을 올리고 있던 시기였다.
그에 비하면 러시아의 복제품은 그들의 노력이 귀여울 정도다.
물론 당시 국력이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지만.
'라파엘로 회랑'은 비록 복제품이지만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에게는 대단한 장소임이 틀림없다.
바티칸에서는 접근이 어려운 '라파엘로 회랑'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직접 거닐 수도 있고 가까이서 관람할 수도 있으니 여제의 복제품에 고마울 뿐이다.
바티칸의 '라파엘로 회랑'은 교황의 거처(Apostolic Palace) 2층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오바마 같은 특별한 방문객들이나 들어가 볼 수 있다.
바티칸의 라파엘로 로지아(교황실 앞을 지키는 교황청 병사의 화려한 복장이 눈길을 끈다.)(위키미디어)
2014년 교황청을 방문한 오바마 전 미대통령이 라파엘로 회랑을 걷고 있다.(위키미디어)
로마에는 라파엘로가 만든 유명한 로지아가 또 있다.
저택 빌라 페르난시스(Villa Fernansis)에 있는 로지아 들이다.
이곳에는 라파엘로가 만든 '큐피드와 프시케의 로지아(The Loggia of Cupid and Psyche)'와 '갈라테아 로지아(The Loggia of Galatea)'가 잘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