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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Jun 15. 2020

23.라파엘의 걸작을 품은
티베르 강변의 저택

Villa Farnesina

바티칸 성당에서 티베르(Tiber) 강변을 따라 남쪽으로 20여분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저택이 있다.

이곳은 개인 사저로 지어진 건물이어서인지 외관상으로는 로마의 다른 건물들보다 오히려 수수해 보이기까지 한다. 겉만 보고 내린 섣부른 판단은 이번에도 보기 좋게 빗나간 듯하다. 

이 저택을 장식하고 있는 멋진 프레스코화들의 가치는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바로 '빌라 파르네시나(Villa Farnesina)' 이야기다. 


16세기 시에나의 금융 재벌이었던 아고스티노 키지(Agostino Chigi)가 1506-1510년에 라파엘을 비롯 페루지, 소도마 등 당대의 명장들에 의뢰하여 지은 빌라다. 

이 빌라는 후에 르네상스 시절 로마의 유력 귀족 집안인 파르네제(Farnese) 가문이 인수해 명칭을 '빌라 파르네시나'로 바꾸었으며 지금은 국가 소유로 되어 있는 곳이다. 


이 집의 역사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이 집에 남은 명장들의 작품이 로마를 찾는 많은 이들의 발길을 잡는 곳이다. 땅을 파기만 하면 유물이 쏟아져 나와 지하철 공사를 못한다는 자랑 같은 푸념을 하는 로마다 보니 또 명화냐 할 수도 있지만 그 주인공이 라파엘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빌라 파르네시나의 정원

잘 가꾸어진 정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3명의 거장 중 한 명인 라파엘의 작품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입장하면 제일 먼저 '갈라테아의 승리'라는 제목의 프레스코 벽화의 방(The Loggia of Galatea)에 들어서게 된다.


'갈라테아의 승리' 벽화 앞에서 설명을 듣는 관람객들

한쪽 벽면을 크게 장식하고 있는 낯설지 않은 작품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눈이 저절로 커진다. 나처럼 '여기 있었구나!' 하면서 반가운 조우를 하는 이들도 많은 듯하다. 워낙 유명한 그림이지 않은가?


'갈라테아의 승리' , 라파엘, 1514년
왼쪽에는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무스가 갈라테아를 응시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Sebastiano del Piombo작)

갈라테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물의 요정이다. 인간인 양치기 아시스와 사랑에 빠졌는데 전부터 갈라테아를 연모하던 외눈박이 거인이 큰 바위로 아시스를 살해하자 그의 영혼을 이탈리아 남부 시실리 섬에 있는 에트나 화산(Mt. Etna) 기슭의 강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신화의 주인공이다.  

연인이 죽었는데 뭐 이런 신나는 그림을 그렸나 할지 모르겠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느꼈으니까.


큰 조개껍질을 타고 등장하는 모습이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라파엘은 주로 성화를 그렸는데 '갈라테아의 승리'는 그가 그린 몇 안 되는 성화가 아닌 그림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승리란 뜻일까?


돌고래가 끄는 큰 조개껍질을 타고 포세이돈의 아들인 트리톤과 천사들의 환영(?)을 받으며 등장하는 갈라테아의 모습은 당시 메디치 가문의 정신적 선생이던 폴리치아노(Angelo Poliziano)가 쓴 '마상시합의 노래'에서 주제를 가져온 것이라 한다. 


폴리치아노의 작품은 당시 피렌체 최고의 가문인 메디치가를 이끌던 로렌초 메디치의 동생 쥴리아노 메디치(Giuliano de Medici)가 1475년 마상 시합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 암사슴을 사냥하던 사냥꾼에게 암사슴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여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여인에게는 다른 구애자들이 나타나고 그녀의 사랑을 차지하려면 시합에서 이겨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시합 전날 밤 꿈에 큐피드가 나타나 시합에서 주인공이 우승할 것이나 여인은 죽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이 여인은 보티첼리의 명작 '비너스의 탄생'의 모델이기도 한 당시 피렌체 최고의 미인인 시모네타(Simonetta Vespucci)로 추정된다. 실제로 유부녀인 시모네타와 쥴리아노는 공공연한 연인 사이였다고 한다. 


미인박명이라던가? 시모네타는 1476년 23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뜨고 쥴리아노도 1478년 라이벌 가문인 파찌가의 습격으로 25세의 나이에 죽임을 당했다. 아래 두 사람의 초상화는 모두 사후에 그려진 작품이다.

쥴리아노 메디치(보티첼리, 1478-1480년,National Gallery of Art), 시모네타(Piero de Cosimo,1501년,샹티 성)


라파엘은 폴리치아노의 작품에서 암사슴이 완벽한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는 부분(Apotheosis)을 '갈라테아의 승리'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설이다. 즉 '갈라테아의 승리'는 폴리페무스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아시스와의 사랑의 승리를 표현한 것이었다. 설명을 듣고 나니 옆에서 갈라테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폴리페무스가 측은하게 보인다.



그런데 이 스토리는 워낙 인기가 있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파리지앵들의 휴식처 뤽상부르 정원(Jardin du Luxembourg)에도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유명한 분수가 있다. '사랑의 분수'라는 애칭으로 젊은 남녀들의 사랑의 언약 장소나 프러포즈 장소로 인기 있는 장소다. 


폴리페무스가 사랑을 나누는 갈라테아와 아시스를 주시하고 있다(좌), 만추의 '사랑의 분수'(우)


이 방의 둥근 천장에는 황도 십이궁(zodiac)이 그려져 있는데 바사리(Giorgio Vasari)가 극찬한 시에나 출신 화가 페루찌(Baldassare Peruzzi)의 작품이다. 황도 십이궁은 주인인 키지의 생일(1466년 11월 29일)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으며 가운데 천장에는 태어난 시간(오후 9시 30분)을 의미하는 그림을 그린  것이라니 참으로 복에 겨운 주인이었다 싶다. 


천장의 황도 십이궁 그림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잡고 있는 메인 천장의 그림


발길을 옮기면 옆 방에는 '큐피드와 프시케의 방(The Loggia of Cupid and Psyche)'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방의 프레스코 역시 라파엘의 작품이다.


'큐피드와 프시케의 방'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관람객들
큐피드와 프시케의 결혼식 장면이 그려진 메인 천장  벽화
꽃과 과일로 장식(Festoons)한 벽화


메인 천장에는 두 주인공의 결혼식 장면과 프시케를 신으로 승격(?)시키자는 올림푸스 신들의 회의 장면이 그려져 있다. 


천장 주변을 장식하는 꽃과 과일 장식은 라파엘의 제자로 프레스코와 스투코(stucco) 장식의 대가인 지오반니(giovanni da udine)의 작품이다. 천장과 벽면의 화려한 장식과 그 안에 그려진 프시케의 우화들을 목을 젖히고 따라가다 보면 뒷목을 안 잡을 수가 없다. 

우리도 잘 아는 큐피드와 프시케의 이야기는 현존하는 로마시대 유일의 장편소설인 '황금 당나귀(Golden Ass)'에 나오는 이야기다. 괴물에게 시집가는 줄 알았던 프시케가 나중에 알고 보니 신랑은 미소년 큐피드였고 둘 사이의 언약을 어기고 잠든 큐피드를 몰래 훔쳐보다가 그만 촛농이 떨어져 큐피드는 떠나가고 그때부터 프시케의 고난이 시작된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큐피드 엄마이자 프시케의 시엄마가 되는 비너스의 혹독한 주문을 이행해야 하지만 결론은 해피엔딩이니 그림의 소재로는 딱이다.

다 아는 이야기니 재미있고 그림 또한 눈을 호강시켜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행복한 뒷목 잡기였다.



'황금 당나귀'에 나오는 큐피드와 프시케의 이야기는 파리 근교 샹티 성(Chateau de Chantilly)에서도 만날 수 있다. '프시케 갤러리'라고 불리는 이곳에는 44개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그림으로만 보던 이야기를 색다르게 감상할 수 있는 기억에 남는 장소다. 

샹티 성의 '프시케 갤러리' 스테인드 글라스




다음 방으로 발길을 옮기면 'The Room of the Frieze'가 방문객의 벌어진 입을 못 다물게 한다.

이 방도 시에나 출신 화가 페루찌(Baldassare Peruzzi)가 1508년 만든 방으로 북쪽과 동쪽 천장은 헤라클레스의 12 과업(Deeds of Hercules)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다른 신화 이야기들도 그려져 있어 보는 재미가 남다른 방이다. 신화 이야기 그중에서도 헤라클레스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흥미진진한 방이다.


'The room of the Frieze'방의 이야기가 있는 멋진 내부
9개의 머리달린 휘드라와 싸우는 헤라클레스(좌), 네메아의 사자와 싸우는 헤라클레스(우)



1층의 세 방을 거쳐 단아하게 꾸며진 계단을 오르면 입이 안 다물어지는 놀라운 광경이 기다리고 있다.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장식

'The Hall of The Perspective Views'라 불리는 방인데 1519년에 완성된 페루찌의 또 다른 걸작으로 만든 방이다.

트롱 프뢰유(trompe-l'oeil:https://brunch.co.kr/@cielbleu/79 참조) 기법으로 장식된 이 방은 어디까지가 실물이고 그림인지 분간이 어렵다.


아래 사진의 오른쪽 아래의 입구만 빼고 웅장한 대리석 기둥부터 뒤로 보이는 마을의 풍경은 믿기지 않지만 모두 그림이다. 잠시 눈을 의심하게 된다. 

트롱 프뢰유 기법이라 해도 너무 리얼한 작품에 방의 이름처럼 투시도를 상상해야만 조금 이해가 가는 방이다. 

실물과 거의 동일한 놀라운 기법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만져보고 싶은 충동도 마구 든다.

하지만 그것이 실물이냐 아니냐를 보지 말고 전체를 감상하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게 어디 쉽겠냐?'며 몸은 자꾸만 벽 쪽으로 기울어진다.


'The Hall of The Perspective Views' 방의 근사한 벽화
1528년 로마 약탈 당시 신성 로마제국 군인들이 남겼다는 조롱 섞인 글
나무로 변신하는 다프네가 그려진 프리즈

벽면의 프리즈 그림에서는 나무로 변신하는 다프네의 슬픈 사연도 보인다. 

이렇게 멋진 벽화에서는 1976년부터 시작된 Restoration 과정에서 흥미로운 글귀가 발견되기도 했다.

1528년 신성로마제국의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로마 약탈(Sacking of Rome)'시 남긴 냉소적인 글귀로 '교황이 신성로마제국 군인들 때문에 도망갔는데 어찌 안 웃는 거냐'라는 뜻의 글귀란다. 

로마가 세워진 이래 16세기 '로마 약탈'은 실제로 가장 악랄하고 처참한 약탈이었다고 한다. 로마 약탈 당시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했고 그 후 몇 개월을 이 곳에서 자가 유배(?)되었을 정도였다니 말이다.

무려 500년도 더 된 역사의 흔적은 이 빌라가 주는 씁쓸한 덤이다.


마지막 방은 주인 치기의 침실로 시에나에서 주로 활동한 화가 소도마(Il Sodoma)가 그린 벽화들로 장식된 'The Room of the Marriage of Alexander the Great &Roxana'로 불리는 방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첫 번째 부인인 록사나와의 결혼식 장면과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한 알렉산더 대왕이 패전국의 왕인 다리우스 가족을 맞이하는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패자인 다리우스 왕의 가족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대왕의 모습은 그의 친화력을 알리는 장면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즐겨 다루는 단골 장면이다. 

그러나 침실에 그려 넣는 주제로는 너무 무겁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늘 그렇듯 그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와는 좀 다른 듯하다.

알렉산더 대왕과 록산나의 결혼식 
다리우스 왕의 가족을 환대하는 알렉산더 대왕





그리스 신화에는 물의 요정 갈라테아 말고 유명한 갈라테아가 한 명 더 있다.

조개껍질 타고 비너스가 도착한 섬이 키프로스다. 그곳의  왕이었던 피그말리온이 조각하여 살아있는 여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여인상의 이름이 갈라테아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장 레옹 제롬, 1890, The MET



















작품이 무수히 많은 것도 아니고 반나절이면 충분히 볼 수 있는 로마의 빌라. 

그러나 이 곳이 주는 감동은 이곳을 방문한 날 오후 내내 근처 카페에서 친구와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뿌듯함으로 남았다. 

다양한 주제의 그리스 신화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들, 그들의 터치로 여러 회화 기법들이 동원된 프레스코화들에 관한 이야기는 석양이 질 무렵에야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바삐 돌아다니지 않았는데도 많은 것을 보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과 이야기로 굉장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멋진 로마의 하루였다.


명작을 마주하고 난 후 마시는 에스프레소는 설명이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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