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역사의 현장이나 거대한 유적 앞에 서 있을 때 우리의 상상력은 나래를 펴고 역사의 한 순간을 실제로 체험하는 대리 경험을 하게 한다. 그 순간 우리와는 상관없을 것 같았던 역사는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한정된 우리의 시간을 넘어서 시간여행을 하게도 한다. 이것이 우리를 끊임없이 여행을 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5000년의 역사가 숨 쉬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면서 20세기를 빛냈던 많은 인물들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듯한 곳이 있다면 이런 여행 프레임에 더할 나위 없이 딱 맞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번 이야기의 출발지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근교 기자(Giza)에는 이집트를 대표하는 피라미드들이 모여 있다. 세계 최대 피라미드인 쿠푸(Khufu) 피라미드, 스핑크스를 전면에 둔 카프레(Khafre) 피라미드, 멘카우레(Menkaure) 피라미드가 함께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유감스럽게도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거대한 유적지가 아니다.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 피라미드(좌로부터)
카이로 시내를 출발하여 30여분 정도를 달리면(물론 카이로의 교통 상황에 따라 이 시간은 변화무쌍하다.) 기자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보이기 시작하는 곳에 세계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의미 있는 장소가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해방을 전 세계에 선언한 '카이로 회담'이 열린 곳이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메나 하우스(Mena House)다.
카프레 피라미드가 보이는 메나 하우스 산책로
1943년, 기자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정원과 객실을 호위하듯 서 있는 이 곳에서연합국 지도자인 영국의 윈스턴 처칠과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중국의 장개석이 참석하여 대한민국의 해방을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인정한 카이로 회담이 열렸다.
'처칠 스위트'에 걸려있는 카이로 회담 주역들의 사진
회담에 참석한 인물들만 봐도 짐작은 가지만 다른 누구보다 우리에게는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메나 하우스다.
이곳은 1869년, 사냥을 위한 로지(Lodge)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 후, 1885년 영국과 프랑스 등 강대국들의 이집트 유적 발굴이 한창이던 때에 영국인 부부가 인수하여 호텔로 개조하였다고. 지금이야 이야깃거리도 안 되겠지만 호텔에 풀장을 가진 최초의 이집트 호텔이었기도 하다.
1900년 경의 메나 하우스
호텔의 이름도 이집트 최초 파라오인 메나스(Menas)의 이름을 따 '메나(Mena)'라고 지었다고 한다. 런던의 대영 박물관(The British Museum)이 자랑하는 '나르메르 팔레트(Narmer Palette: 화장품을 만드는 데 사용한 석판)'의 주인공 '나르메르'가 바로 이집트 최초의 파라오 메네스(Menes)라고 했던 대영 박물관 오디오 가이드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하우스를 에워싸고 있는 정원의 야자수 너머로 삐죽이 얼굴을 내민 세계 최대 피라미드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나르메르 팔레트'와 피라미드가 보이는 메나 하우스 정원 사진
호텔 복도에는 이 곳의 유명세를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방문한 유명인들의 사진과 족적이 남아 있어 그저 머물다가는 호텔이 아님을 강렬하게 느끼게 한다.
이곳에 머물렀던 많은 유명인사들의 이름은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다.
각국의 원수들 가운데는 닉슨, 지미 카터와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의 이름도 보이고 1,2차 세계 대전중 각각의 전쟁 영웅인 몽고메리와 롬멜도 전쟁 중 이곳에 머물렀단다.
작가 중에는 아가사 크리스티와 코난 도일도 있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고고학자인 남편이 피라미드 유적지 개발에 참여하는 동안 이곳에 머물며 '나일 살인 사건'(1937년)을 집필했다고 한다.
셀레브러티들 중에는 오마 샤리프, 프랑크 시나트라, 엘리자베스 테일러, '십계' 영화 촬영 당시 3개월을 묶었다는 찰톤 헤스톤의 이름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그중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메나 하우스의 복도와 전시된 유명 방문객들의 사진
메나 하우스는 본 건물(Wing Palace)과 후에 증축된 건물(Garden Palace), 두 파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메나 하우스의 본건물에는 '처질 스위트'와 '몽고메리 스위트'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운이 좋게도 방문한 날 스위트의 숙박자가 없다고 호텔 매니저는 이 방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처칠 스위트'는 처칠의 기념사진이 걸린 책상과 카이로 회담 참석자들의 사진 등으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듯 꾸며져 있었다.
632호 처칠 스위트 내부
메나 하우스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몽고메리(Benard Law Montgomery:1,2차 대전 영국의 전쟁 영웅, 바로 그 'Monty'다) 스위트'는 호텔 도착 시간이 밤이라 테라스에서 바로 피라미드가 보인다는 드라마틱한 전망은 직접 볼 수 없었지만 엽서나 사진 속에 남아 있는 바로 그 유명한 테라스에 서 본 다는 것만으로도 흡족한 방문이었다.
'몽고메리 스위트' 입구와 '몽고메리 스위트' 테라스에서 보는 전망 사진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머물렀던 곳이라 생각하니 메나 하우스가 더 나아가 카이로가 역사적, 지리적으로 대단한 위치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배경을 온전히 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위상이 안타깝기도 하고.
복도에는 이집트 현지인에게 서빙을 받는 커플의 사진이라든가 피라미드 위에서 구두와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 사진들을 보다 보니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엘긴 마블(Elgin's Marbles)'이 생각난다.
메나 하우스에 전시되어 있는 20세기 초 사진들
19세기 초 스코틀랜드의 귀족인 7대 엘긴 백작(Earl of Elgin)이었던 토마스 부르스(Thomas Bruce)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아크로 폴리스에 있던 다른 건물들의 부조물들을 영국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1832년, 그리스가 오토만 제국의 지배하에서 독립하면서 이 유물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아직도 이 부조물들은 런던의 대영 박물관의 한 방을 차지하고 있다.
쌍방의 이런 논쟁 속에 세계적 유적을 자기 나라로 가져간 열강들은 자신들의 보호가 있었기에 오래된 유적들이 그나마 지금의 모습으로 관리되고 있는 것이라 항변한다니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유네스코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메나 하우스 로비
메나 하우스의 로비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생각은 얼마 전 다녀온 베를린 근교에 있는 세실리엔호프 궁(Cecilienhof Palace)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나눠 미국과 소련이 신탁통치를 하도록 한 1945년의 '포츠담 선언(Potsdam Conference)'이 나온 곳이다.
이 궁은 20세기 초 독일의 빌헬름 2세가 큰 아들 내외를 위해지어 준 아담한 저택(?) 같은 궁이다. 궁의 입구에는 소련을 상징하는 빨간 별 모양의 꽃밭이 아직도 남아 있어 역사적 장소임을 실감케 해준다.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연합군 지도자들(처칠, 트루먼, 스탈린)은 종전 후를 의논하기 위해 장소를 물색하던 중 처음에는 1945년 7월 항복한 독일의 베를린을 고려했으나 폭격으로 무참히 파괴된 베를린보다는 베를린 근처(차로 40여분 거리)의 비교적 피해가 적은 이곳을 택했다는 뒷 이야기다.
패전국 독일에서 승전국 대표들이 모여 논의를 한 곳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비슷한 이야기를 떠올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