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실리의 주도인 팔레르모에는 이 도시의 수호 성녀이자 중세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흑사병의 수호 성녀 로잘리아(Santa Rosalia:1130-1166)가 있다.
그녀는 샤를마뉴 대제의 후손인 노르만 귀족 가문의 딸이었다. 로잘리아는 어느 날 성령의 부름으로 두 천사의 인도를 받아 팔레르모 근처에 있는 몬테 펠레그리노(Monte Pellegrino) 산의 동굴에서 기거하며 신앙생활을 하다 홀로 숨을 거둔 성녀다.
펠레그리노 산 정상의 로잘리아 동상
그녀의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많지 않으나 그녀가 사후에 보인 기적으로 많은 시실리 인들의 추앙을 받는 성녀다.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14세기의 흑사병은 17세기에 다시 시실리에 창궐했다. 흑사병은 14세기 대유행을 한 후에도 19세기까지 끊이지 않고 유럽을 위협했다.
1624년, 성녀 로잘리아는 처음으로 흑사병에 걸린 여인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어 사냥꾼 앞에도 나타난 로잘리아는 자신의 유골이 펠레그리노 산의 동굴에 있음을 알려주고 자신의 유골을 찾아 팔레르모 시내를 3바퀴 돌라 하니 거짓말처럼 흑사병이 멎었다는 것이다.
이 기적으로 로잘리아는 팔레르모의 수호 성녀이자 흑사병의 수호 성녀가 되었다.
파리의 수호 성녀 쥬느비에브(Sainte Genevieve)의 기적 일화와 매우 흡사하다. 유럽에는 이와 비슷한 기적 이야기가 많은 것을 보면 그만큼 당시 흑사병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탈리아 화가 피에트로 노벨리(Pietro Novelli)는 로잘리아 성녀에게 검은 옷을 입혀 그녀를 흑사병의 수호 성녀로 그렸다.
'흑사병의 수호 성녀 로잘리아', 피에트로 노벨리(왼쪽 파란 옷의 천사가 들고 있는 'Eris in peste Patrona'가 "흑사병의 수호성인'이란 뜻이다.)
그런가 하면 시실리의 팔레르모 시립 박물관 1층에는 작자 미상의 벽면 전체를 차지한 커다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죽음의 승리'라는 제목으로 그려진 대작이다.
14세기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흑사병의 공포를 그린 그림이다.
갈기를 휘날리며 종횡무진 달리는 백마를 탄 해골이 인간을 향해 마구 죽음의 화살을 쏘아대는 모습은 당시 흑사병이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를 짐작케 한다.
'죽음의 승리', 작자 미상, 1450년경
그림에서 해골은 죽음의 사자다. 서양 회화에서 죽음의 사자는 커다란 낫을 든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Chronos)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중세에 와서는 죽음의 사자는 '그림 리퍼(Grim Reaper)'라는 낫을 든 해골로 그려지곤 한다.
크로노스, Giovanni Francesco Romanelli,17세기(좌)/ 그림 리퍼, Gustave Dore,1865(우)
작자 미상의 이 그림 속의 해골은 옆구리에는 크로노스의 커다란 낫을 차고 동시에 죽음의 화살을 날려 인간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모습이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4명의 기사를 목판화로 남겼다. 죽음을 나타내는 낫을 든 기사, 기근을 나타내는 저울을 든 기사, 전쟁을 뜻하는 칼을 든 기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병을 나타내는 활을 든 기사인데 '죽음의 승리'의 해골은 낫과 활을 모두 들고 있으니 역병과 죽음의 포스가 확 느껴진다.
요한 계시록의 네 기사, 1498, Albrecht Durer
죽음의 화살을 맞고 말 아래 쓰러진 인물들을 보면 성직자와 귀족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반면 말이 지나온 뒤쪽을 보면 살아남은 이들의 모습은 오히려 수수한 차림이다. 기록상으로도 흑사병은 사람들이 밀집한 도시가 피해가 더 컸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는 현세의 권세도 무용지물이란 뜻 이리라.
지금은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으로 많은 이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유명 관광지가 된 시실리지만 중세에는 이곳도 흑사병의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안전지대긴 커녕 유럽에서 제일 먼저 흑사병이 발발한 곳으로 기록에 남아있기 때문에 성녀 로잘리아와 '죽음의 승리'는 시실리 인들에게 아직도 큰 의미로 남아 있는 것 같다.
흑사병이 어떻게 유럽에 창궐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들은 분분하지만 그중 가장 힘을 얻는 주장은 1347년 몽고군이 흑해 북쪽의 무역항인 카파(현재 페오도시야:Feodosia)를 공격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침략자 몽고군들의 영내에는 이미 흑사병이 돌고 있었고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카파를 공격할 때 대포알로 사용했다고 한다. 1334년 원나라가 지배하던 중국의 허베이(황하강 북쪽 지역으로 북경 주변이다)에는 이미 흑사병이 창궐하여 인구의 90%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흑사병 균은 몽고군을 따라 흑해 연안까지 이동해 왔던 것이다. 카파는 당시 동방 무역을 주관하던 제노바 공국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카파에 흑사병이 창궐하자 놀란 이들은 모두 본국인 현재의 이탈리아로 철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국으로의 귀환은 중세 유럽 팬데믹(pandemic)의 시작이었다.
시실리의 관문이었던 메시나(Messina)에 1347년 배 한 척이 도착하면서 유럽의 재앙은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흑사병 균과 함께 온 이 배의 선원들은 곧 전부 사망했으며 다음 해에는 북부 이탈리아의 제노바와 베니스를 흑사병이 휩쓸었다.
무서운 흑사병 앞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1350년대 유럽은 매우 음울할 수밖에 없었다. 어림잡아 인구의 1/3이 죽음으로 내몰렸으니 염세주의가 판을 치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사람들은 흑사병의 증세로 몸에 반점이 생기면 죽음을 직감했고 병에 대한 원인을 모르니 약도 무용지물이고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한 일종의 공황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역병을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받아들였으나 절대적 존재였던 중세 교회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다.
난세에 사람들은 기도에 모든 것을 맡겨도 보고 당시 의학의 힘에 의존하여 흑사병 의사를 탄생시키기도 했고, 환자들의 격리도 시행해 보았지만 흑사병의 광풍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은 신에 대한 속죄양을 찾기에 이르게 되었다. 'Carpe Diem'과 'Memento Mori'가 혼란스럽게 교차하는 시절이었다.
매년 1,2월에 열리는 베니스의 가면 페스티벌(Carnevale di Venezia)에는 유독 눈길을 끄는 가면이 있다. 새의 부리 모양을 한 기묘한 느낌을 주는 가면이다. 흑사병 창궐 당시 의사들이 쓰고 다녔다는 이 가면은 새 부리처럼 생긴 길고 뾰족한 코가 특징이다.
흑사병 창궐 당시 환자를 치료하던 의사들은 예방책으로 새의 부리 안에 향이 좋은 허브를 넣고 다녔다고 한다. 좋은 향, 몸에 좋은 향을 맡으면 흑사병에 걸리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 사항이었을지도 모른다. 흑사병 의사는 전문의보다는 이류 의사들이 주로 맡았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언가로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도 흑사병 의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워낙 흑사병의 치사율이 높다 보니 이 의사가 다녀가면 그 사람은 곧 죽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주위 사람들은 패닉에 빠지곤 했다니 의사인지 장의사인지 존재감이 분명치가 않다.
흑사병 의사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온 몸을 가죽으로 감싸고 눈은 안경 모양의 유리로 덮었으며 손에는 가죽장갑을 낀 채 지팡이 같은 도구를 들고 있다. 이 도구는 환자의 맥을 짚는 데 사용했다니 결과가 어땠을지 짐작이 된다.
흑사병 의사, 1656년 판화
흑사병의 원인과 치료 방법을 몰랐던 이들은 일단 환자가 생기면 '격리'를 최선의 방법이라 여겼다. 현재 우리가 공항 입국장에서 보는 '검역(Quarantine)'이란 단어도 흑사병이 유행하는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40일(Quarantenaria) 격리' 시킨대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40일 격리'를 시행했던 곳이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관광 명소 두브로브니크(Dubrovnik)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두브로브니크 구 시가지
이런저런 방법이 효과가 없자 흑사병이 신의 분노라 믿게 된 유럽인들은 결국엔 신의 분노를 가라 앉히기 위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의 관동 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듯이 말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여 신의 분노를 자초한 사람들이라면서 희생양으로 유대인을 공격했다. 유럽인들을 더욱 자극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비교적 흑사병의 피해가 적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율법대로 손을 자주 씻어 청결을 유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는데 어쨌거나 피해가 적다는 것이 빌미가 되었다. 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루머를 퍼뜨리고 누명을 씌어 대학살을 자행했다. 관동 대지진 때에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씌었던 누명과 너무나 흡사하다. 시대가 다르고 민족이 달라도 생각해 내는 것은 비슷한가 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고통과 극복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승화하기 시작했다.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성당을 짓는가 하면 고통을 잊지 않도록 글과 그림으로 남기기 도 했다.
베니스를 여행할 때 산 마르코 광장에 도착하기 전 오른편에 둥근 돔을 한 커다란 성당이 보인다. 산타 마리아 살루테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la Salute)이다. 17세기(1682년)에 완공된 아름다운 이 성당은 흑사병으로 죽은 이들을 위로하고 베니스를 흑사병으로부터 지켜주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지은 성당이다. 지금은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먼저 들어오지만 흑사병의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건물이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바라본 산타 마리아 살루테 성당(왼쪽의 하얀 돔 건물이다)
그런가 하면 14세기 이탈리아 소설가 지오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는 1348년에 흑사병이 피렌체에 퍼져 10만에 가까운 시민이 죽음을 당하자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를 탈출하여 시골의 별장으로 피신을 가는 남녀의 이야기를 담은 불후의 명작 '데카메론'(1350-1353)을 써내기도 했다.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에는 시실리의 작품과 같은 제목(The Triumph of Death)의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1562년 작품으로 시실리의 작품보다 100여 년 후의 작품이나 작품 속의 내용은 죽음을 나타내는 해골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인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 아직 흑사병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16세기 유럽인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흑사병의 광풍 속에서도 위대한 예술 작품은 만들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죽음의 승리, Pieter Bruegel the Elder, 1562, 프라도
기존의 사회 질서가 무너져 내리고 가까운 가족과 친지를 잃고 일상화된 죽음의 위험에서 탈출구가 안 보이는 비극과 대혼란의 와중 속에서 중세는 오히려 '르네상스'라는 예기치 못한 대 반전을 이루어 냈으니 인간의 끈질긴 저력은 과연 어디까지인지?
그렇다면 중세 유럽을 초토화했던 흑사병은 '죽음의 승리'가 아니라 결국 '인간의 승리'로 귀결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