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북쪽으로 차를 1시간 정도 달리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16세기 귀족의 성이 있다.
이 지역 유력 집안이었던 몽모헝시(Montmorency) 가문의 성으로 외교관이면서 프랑스와 1세 왕의 충신이었던 '앤 드 몽모헝시(Anne de Monmorency:1493-1567)'를 위해 1528-1531년에 지어진 샹티 성이다.
앤 드 몽모헝시, 쟝 클루에, 1530
파리지앵들에게는 하루 나들이 코스로 안성맞춤이고, 파리를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샤를 드골 공항으로 입출국할 때 스케줄에 따라 방문하기 알맞은 성으로 인기 있는 성이다.
성이 많기로 유명한 프랑스에서 왕의 성도 아닌 귀족의 성이 어떤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기에 유명세를 타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샹티 성이 파리 근교의 성 중 루브르 다음으로 예술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흥미 있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성이란 것을 알고 나면 방문자의 발걸음은 빨라질 수밖에 없다.
성에 도착하여 입구로 향하다 보면 최초 성주였던 '앤 드 몽모헝시'의 기마상이 성을 바라보고 있는 특이한 구조가 멀리 눈에 들어온다. 대개는 성주의 동상이 성을 뒤로하고 앞에 서 있지 않던가?
샹티 성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앤 드 몽모헝시'의 기마상
게다가 성의 입구에는 루브르에 전시되어 있는 미켈란젤로의 '죽어가는 노예상'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어 심상치 않은 포스가 느껴진다.
성 입구의 '죽어가는 노예상'
샹티 성은 프랑스의 대부분의 성들의 운명이 그러하듯 프랑스 대혁명 당시 감옥으로 사용되다가 결국은 파괴되어 1870년에 재건축한 것이다.
지금은 마지막 성주였던 'Henri d'Orleans'의 유언에 따라 ‘Institute de France’ 소속으로 되어있는 성이다. 그는 프랑스의 마지막 왕인 루이 필립의 5번째 아들이었는데 오늘의 샹티 성이 있게 한 장본인이다. 그의 유언에 따라 샹티 성은 1898년부터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
Henri d'Orleans(좌), 샹티 성과 정원(우)
샹티 성에는 보석 같은 ‘꽁데 미술관(Musée Condé)’이 있다. '꽁데'는 루이 14세 때 이 성의 성주였던 'Great Condé'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파리 근교의 성 중에서 루브르 다음으로 소장품이 많다는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꽁데 미술관에 들어 선 순간 빼곡히 전시된 작품들을 보니 숨이 막힐 정도다.
1000여 개의 회화작품과 2500여 개의 drawing을 전시하고 있다는 샹티 성은 건물을 구경하는 재미보다 이 작품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월등한 성인 것 같다.
보티첼리, 라파엘에서부터 앵그르, 들라크루와, 드캉(Decamps)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대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일일이 이름을 나열할 수도 없다.
반가운 마음으로 빼곡히 전시된 명화들을 보다 보니 이 대작들을 여유 있게 전시해야 할 공간이 허락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
뮤제 꽁데의 아트 갤러리
아트 갤러리에 전시된 '시모네타 베스푸치'(보티첼리도 연모한 그녀는 피렌체 최고의 미녀였다)
La Tribune(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명작들
갤러리에 전시된 보티첼리의 '가을'
라파엘 방에 전시된 작품들
푸생(Poussin)과 드캉(Decamps)의 그림
또 하나, 샹티 성에서 꼭 봐야 할 것은 큐피드와 프시케의 신화 이야기를 스테인드 글라스로 만들어 놓은 ‘프시케 갤러리(Psyche Gallery)’다. 로마시대의 유일한 고전인 '황금 당나귀(Golden Ass)'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로 우리도 익히 아는 프시케와 큐피드의 결혼과 프시케의 신격화에 대한 이야기 내용을 44장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프시케 갤러리의 스테인드 글라스
이것은 16세기 중반에 만들어져 '앤 드 몽모헝시'가 소유하고 있던 또 다른 성인 '에쿠엉 성(Ecouen:샹티 성에서 20km 떨어진 곳에 있다)'에 보관 중이었는데 프랑스 대혁명 당시 파괴될 것을 염려해 파리에 있던 ‘Museum of French Monuments’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가 다시 샹티 성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스테인드 글라스이지만 우리가 아는 화려한 색감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니라 거의 무채색에 가까운 회색톤(그리자이 기법:Grisaille)으로 만들어져 회화적인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조각한 듯한 독특한 느낌을 주는 갤러리다.
프시케 갤러리를 보고 있자니 런던의 코톨드 갤러리(Coutauld Gallery)에서 브뤼겔의 그리자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가생각난다. 화려한 색채의 향연 속에 걸려있던 회색톤의 브뤼겔의 작품은 잠시 나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는 듯했다. 빨려 들어가는 느낌의 이 기법은 특이한 화풍을 자랑하는 브뤼겔의 다른 회화 작품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으로 오래도록 남아있다.
'간음한 여인과 그리스도', Pieter Bruegel the Elder ,1565, Coutauld Gallery(런던)
그런가 하면 샹티 성에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멋진 서고도 있다.
2층으로 장식된 이 서고에는 6만여 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성의 마지막 성주는 책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그러나 그는 책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는 원고나 서류들에도 관심이 많아 수집해 놓았다니 그의 혜안에 감탄할 뿐이다. 샹티 성의 서고에는 보유하고 있는 장서의 양만큼이나 중요한 우리가 꼭 봐야 할 귀한 자료가 있다.
샹티 성의 멋진 서고
샹티 성이 소장한 장서 중 최고의 것은 이름 하여 ‘Tre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다. 직역하자면 ‘풍요로운 시간들’ 정도가 될까?
이것은 현존하는 프랑스 고딕 원고( manuscript illumination) 중 가장 유명하고 보존이 잘된 중요 자료라고 한다. 유럽의 박물관을 구경하다 보면 중세에 만들어진 책이나 원고 가운데 금박과 화려한 색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자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샹티의 '풍요로운 시간들'은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아주 귀한 작품이라고 한다.
1412년에서 1416년 사이에 림부르그 형제(Limbourg brothers)가 베리 공(Duke of Berry)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완성을 못한 채(이들은 모두 흑사병으로 죽었다)로 전해오다가 후에 쟝 코롬브(Jean Colombe:1430-1493)에 의해 1470년대에 완성된 것이다.
그 후 수차례 주인이 바뀌어 오다가 이탈리아 제노바의 귀족이 이것을 판다는 소식에 샹티의 마지막 성주였던 Henri d'Orleans은 1856년 곧장 제노바로 달려가 기어코 샹티 성으로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Tre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의 일부
'풍요로운 시간'의 생 샤펠 성당이 그려진 6월(좌), 루브르가 그려진 10월(우) 달력
'풍요로운 시간'의 내용은 일종의 중세 달력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달별로 당시 농업 형태나 건축 양식 등을 세세하게 그리고 있어 중요한 시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중 6월에는 배경으로 파리의 생 샤펠(Saint Chapelle) 성당이 그려져 있고 10월에는 루브르가 그려져 있으니 15세기 당시의 두 건축물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 감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포인트가 된다.
샤토 투어가 끝나면 출구에 카페가 하나 있다.
피곤한 다리도 쉬고 감상한 명작들도 다시 생각해 보기에 안성맞춤인 카페다. 그러나 이 카페는 어디나 있는 그냥 그런 카페가 아니다. 왜냐면 우리가 즐겨 먹는 생크림(휘핑크림)의 원조를 맛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휘핑크림이 최초로 만들어진 곳이 바로 이 샹티 성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성과 미술관을 관람 한 뒤 당이 떨어질 때쯤 샹티 성 안의 카페에서 맛보는 오리지널 샹티 크림의 달달한 맛은 단 것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썩 괜찮은 경험이 된다.
'휘핑크림(Whipping Cream)'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샹티 크림'에 관해 어떤 이는 휘핑크림보다 좀 더 달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당이 떨어진 방문객의 입맛에는 맛있기만 하다.
아주 부드럽고 느끼하지 않아 계속 먹게 되는 묘한 매력의 샹티 크림은 잠깐 주의하지 않고 양껏 먹다 보면 지구를 7바퀴 반이나 돌아야 하는 극심한 다이어트에 돌입해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를 웨이터가 한다. 아무튼 긴장하고 먹어야 하는 요주의 디저트다.
이 파티를 준비한 셰프는 프랑수아 바텔(Francois Vatel:1631-1671). 당시로 치면 미슐랭 스타 셰프였던 바텔이다.
성대한 파티 후 괘씸죄에 걸린 푸케가 체포되자 바텔은 겁에 질려 영국으로 망명을 했다. 그는 후에 샹티 성의 성주인 ‘콩데 장군(Grand Conde)’에게 발탁되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고 샹티 성에서 루이 14세를 다시 대접할 기회를 갖게 된다. 심혈을 기울여 왕의 환심을 사고자 최선을 다하던 바텔이 이 파티에서 만든 것이 바로 오늘날 그 유명한 ‘샹티 크림’이라고.
그러나 루이 14세가 3,000명이나 되는 엄청난 인원을 거느리고 오는 바람에 바텔의 노력이 빛을 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스스로 파티 음식이 미흡했다고 생각한 바텔은
자신에게 실망한 나머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마는데.
당대의 스타 요리사가 샹티 크림만 남기고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샹티 성 카페의 샹티 크림
바텔의 이야기는 2000년 프랑스의 유명 배우 제라르 뒤빠르디유(Gerard Depardieu)가 주연을 맡아 영화로 만들어졌었다. 실제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점도 있으나 당시 식탁 예절이나 음식들을 엿보기에는 좋은 영화다. 요리사는 단순히 요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무대의 연출자가 되어야 하며 우리가 유럽의 정물화에서 자주 보는 식탁의 데코레이션들이 모두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영화였고 왕들의 화려한 생활이 상상 이상이었음을 보고 놀라기도 했던 영화였다.
비극적인 바텔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내려오는데 바텔이 샹티 크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지만 사실은 아니라고 한다.
샹티 크림과 유사한 휘핑크림은 이미 카트린느 드 메디치 시대부터 있었고 오늘날과 같은 샹티 크림은 훨씬 후인 18세기 중반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지만 많은 이들은 바텔의 슬픈 이야기를 더 믿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작가였던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1768-1848)과 당시 사교계의 여왕 마담 레카미에(Juliette Récamier:1777-1849)의 데이트 모습 말이다. 이곳은 두 사람이 말년에 밀회를 즐겼던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그들의 러브 스토리에 어울리게 사랑의 여신 비너스를 위한 신전이 정원의 한 부분을 장식하고 있었다.
마담 레카미에, 프랑수아 제라르, 1805, 까르나발레(좌), 샤토브리앙, Anne-Louis Girodet de Roussy-Trioson,1810(우)
샹티 성 안의 고즈넉한 정원
정원의 비너스(Venus Callipyge) 신전, Victor Dubois, 1819
예술 작품이면 예술 작품, 음식이면 음식, 거기다 풍성한 이야기 까지.
물려받은 유산으로 많은 예술품을 모으고 그것을 다시 대중에게 돌려준 성주의 큰 결심 은 샹티 성을 반짝이는 보석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우리는 그곳에 가면 절대 실망하지 않는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샹티 성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먹고 피곤할 만도 한데 피곤하기는커녕 흡족한 마음에 날아갈 듯 가볍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