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레에서 만나는 특별한 박물관
마레(Le Marais)는 프랑스어로 '늡지'라는 뜻이다.
13세기 템플 기사단이 파리 외곽(현재 마레의 북쪽 지역)에 요새화 된 교회를 짓자 주위에 많은 교회들이 지어지면서 마레는 귀족들의 인기 주거지가 되었다. 앙리 4세 때인 1605년 현재 보쥬 광장(Place des Vosges)이라 불리는 로열 광장(Royal Square)이 만들어지면서 17세기까지 마레는 프랑스 귀족들이 파리에서 가장 선호하는 주거 지역이었다.
보쥬 광장 그 후 귀족들이 생 제르망 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하고 센 강을 중심으로 교역량이 늘어나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마레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현재도 마레는 파리의 가장 큰 유대인 밀집 지역으로 이스라엘 전통 음식인 팔라펠(Falafel)이나 유대인 전통 모자 '키파(Kippah)'를 쓴 남자들을 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곳이다.
마레에서 가장 유명한 팔라펠 가게 1964년 드골 대통령 당시 문화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마레를 보호지구로 선포하면서 많은 귀족의 저택들이 보수되고 뮤지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피카소 뮤지엄, 코냑 제이(Cognac- Jay) 뮤지엄 등이 그 좋은 예로 '까르나발레'도 그중 하나다. 프랑스는 보호지구로 지정되면 자기 집이라 해도 마음대로 개보수를 할 수가 없다. 그 덕에 지금도 파리에서는 중세의 건물을 볼 수 있긴 하지만 실제 거주하는 이들에게는 보통 불편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1548년에 지어진 까르나발레 저택은 파리 재정비 사업을 진두지휘했던 오스만 남작에 의해 파리 시의회가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1880년 대중에게 문을 열었으며 파리의 시작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조금 특이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까르나발레 입구(위키미디어) '승리의 여신'정원
그들의 소장품은 선사시대 유물부터 프랑스 대 혁명을 거쳐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를 총망라하고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60만여 개에 이른다는 소장품으로 건물이 포화 상태가 되자 1989년 바로 옆의 저택(Hotel Le Peletier de Saint-Fargeau)을 사 들여 옆 건물을 부속건물로 확장했다. 까르나발레 본관에는 16세기부터의 작품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고 부속 건물에는 파리 선사시대, 갈로로만 시대, 프랑스혁명관, 19,20세기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안내서 역시 루이 14세
까르나발레 입구에 서 있는 루이 14세 동상(Antoine Coysevox작) 까르나발레 입구에 들어 서면 역시 낯익은 동상이 우리를 맞아 준다. 누구겠는가? 태양왕 루이 14세다.
그의 환영을 받으며 들어서면서 까르나발레의 투어는 시작되는데 그런데 그 작품들의 수준이 상상 이상의 수준급들이라 일반 시립 박물관 정도를 상상하고 방문했다가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될 것이다.
100여 개에 이르는 각 전시실을 다 누비려면 만만치 않은 시간과 체력이 요구된다.
이 곳을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했던 친지는 파리 관광 일정을 전면 수정했던 적이 있다.
입장하여 첫 전시실은 여러 종류의 간판 사인이 전시되어 있는 사인 갤러리다.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가게 주인의 직업을 알려주는 재미있는 사인을 내건 상점들을 자주 보게 된다. 까르나발레에는 파리와 관련된 특이한 간판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몽마르트의 대표 카바레(https://brunch.co.kr/@cielbleu/29 참조)였던 '샤누아(Chat Noir)'의 간판이다. 물론 보는 이의 취향에 따라 시간은 가감이 될 테지만 시대별로 꼭 보아야 할 작품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한다.
사인 갤러리 전경과 '샤누아(Chat Noir)' 간판
까르나발레가 보여주는 파리의 역사들
1. 선사시대 유물관
믿거나 말거나 기원전 4600년경 만들어진 통나무 카누(Neolithic dugout canoes)가 전시되어있다. 이것은 파리 시 훨씬 이전 이 지역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만들어진 나무가 오래전 이 지역에 존재하던 나무로 밝혀지면서 까르나발레에서 가장 오래된 파리의 유물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1991년 파리 시내 Bercy 지역 공사 중 발굴되었다.
선사시대 카누(위키미디어) 2. 16세기 퐁뇌프 앙리 4세 기립상의 조각들
프랑스인이 가장 사랑하는 왕이었던 앙리 4세(https://brunch.co.kr/@cielbleu/9 참조)의 두 번째 왕비 마리 드 메디치(https://brunch.co.kr/@cielbleu/22 참조)는 앙리 4세가 죽은 뒤에 그를 기념하기 위한 조각상을 자신의 고향인 이탈리아로부터 공수해 왔는데 그만 동상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실코오던 배가 침몰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퐁 뇌프에 세워진 기립상은 프랑스 대 혁명 때 다시 한번 혁명군에 의해 파괴되는 고난의 시간을 갖게 된다. 혁명군에 의해 파괴된 기립상은 1817년 조각가 프랑스와 르모(Francois-Frederic Lemot:1772-1827)에 의해 오늘의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혁명 당시 파괴된 원본 조각들이 이 곳에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와 르모는 파리의 카루젤 개선문 위의 승리의 여신 상을 제작한 조각가이기도 하다.
퐁 뇌프의 다리 옆은 381개의 부조들(mascaron: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건축물에 장식해 놓는 얼굴 모양의 부조물로 주로 고대 신화에 나오는 숲의 정령들의 모습이다)로 장식되어 있다. 현재 퐁뇌프의 부조물들은 19세기에 다시 만들어 놓은 복사본 들이다. 19세기에 다리를 재 정비할 때 원래 부조 중 6개를 까르나발레에서 보관, 전시하고 있다.
말 다리 조각과 퐁뇌프의 원조 부조물들
3. 17세기 마레의 문필가 마담 세비니(Madame de Sevigne:1626-1696) 전시실
<마담 세비니:1665>,Claude Lefebvre작,까르나발레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지만 루이 14세 시대 귀부인으로 딸에게 보낸 1000 여 통의 편지가 서간집으로 발간되면서 그녀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으로 프랑스 문학의 중요한 아이콘으로 평가되는 여인이다.
게다가 마담 세비니는 프랑스 인들이 전형적인 미인형으로 뽑는 여인이다.
그녀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마레의 보쥬(Place des Vosges) 광장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나이(7살)에 부모를 모두 잃고 아저씨 손에서 키워졌지만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타가 인정하던 마담 세비니는 꽃다운 나이 24세에 과부가 되고 만다.
남편이 정부(mistress) 문제로 결투를 벌이다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미모와 재능을 모두 겸비한 아내를 두고도 다른 여인과 내통한 남편은 욕심이 과했던 게 틀림없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과욕이 언제나 화를 부르는 데는 예외가 없다.
그녀는 루이 14세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니콜라 푸케 싸롱의 단골손님이기도 했는데 혼자가 된 후에는 푸케의 구애를 받기도 했다. 후에 푸케가 베르사유의 모델이 된 보르비콩트 성을 지어 루이 14세의 노여움을 사 서 재판에 처해졌을 때(https://brunch.co.kr/@cielbleu/8 참조) 같은 고향(브르타뉴) 사람인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 왕권 앞에 푸케의 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남편 사후 그녀는 많은 구혼 요청을 받았지만 모든 구혼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식 교육에 헌신하며 한 평생을 살았다.
딸인 프랑스와는 발레에 재능이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였는데 발레 광이었던 루이 14세의 상대역으로 발레 공연을 할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한 파티에서 왕의 테이블에 초대되어 앉아 있는 모녀의 모습을 보고 주위 사람들은 루이 14세의 다음 정부(mistress)는 프랑스와가 되겠다고 수근 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루이 14세의 관심은 마담 몽테스팡(Madame de Montespan;1670-1707)에게로 가있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프랑스와는 프로방스의 귀족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마담 몽테스팡(Marquise de Montespan:1640-1707)
루이 14세의 두 번째 정부로 첫 번째 정부를 수도원으로 몰아내고 왕의 정부가 된 여인이다. 왕비인 마리 테레즈에게도 안하무인격으로 대하고 왕의 사랑이 식을까 두려워한 그녀는 미신에 의지하다가 결국 그 일로 왕의 사랑을 잃게 되었다. 그녀도 왕에게 버림받은 뒤 결국 자신도 왕의 첫 번째 정부처럼 수도원으로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남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자기 눈에선 피눈물 난다는 옛말의 좋은 사례다.
<프랑스와 세비니>, Pierre Mignard 작, 까르나발레 <마담 몽테스팡>, 작자미상, 베르사유
딸이 프랑스 남부로 시집을 가면서 딸에게 쓰기 시작한 편지가 30여 년 동안 무려 1000여 통이 넘고 그중에는 한 번의 편지가 20장이 넘는 것도 있다고 한다.
그녀의 편지에는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이 위트 있는 문체로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어 문학적 가치와 함께 당시 사회상을 엿보는 좋은 자료로도 평가된다고 한다.
좋은 예로 당시 화제였던 재무 장관 니콜라 푸케의 재판 과정이라든가 샹티 성의 총주방장이었던 바텔(샹티 크림으로도 불리는 휘핑크림의 창시자)의 자살 사건 등을 상세히 적고 있다.
1677년에 까르나발레로 이사 온 그녀는 죽는 날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까르나발레의 터줏대감인 셈이다. 지금도 까르나 발레에는 그녀가 썼던 가구들과 딸과 친지들에게 보낸 친필 편지들이 전시되어 있다.
1696년 병중인 딸을 간호하다가 고열로 세상을 뜨는데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딸은 병중이라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래서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는가 보다.
1725년 28개의 편지가 최초로 발간되었으며 그녀의 서간문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내레이터의 할머니가 즐겨 읽는 책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까르나발레 박물관 옆 길이름 조차 'rue de Sevigne'인 걸 보면 이 지역에 남아있는 그녀의 영향력이 느껴진다.
마담 세비니의 서간집(위키미디어)과 까르나발레 근처의 세비니 이름을 딴 카페
4.18세기 전시관
18세기 당시 인테리어와 자기류, 페인팅들이 숨 쉴 틈도 없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다.
다음 이야기는 '파리의 하늘 아래 II'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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