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의 총독이었던 무함마드 알리는 외교의 한 수단으로 고대 이집트 문명의 엄청난 유산을 국력을 키우는데 아낌없이 이용했던 것이다.
센트럴파크(좌)/탬즈 강변(우)
이런 류의 그림들은 역사적 왜곡을 입증하는 자료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스핑크스의 깨진 코에 대한 분분한 의견의 종지부를 찍은 그림이 대표적 예이다.
18세기 나폴레옹 군대가 이집트 원정 길(1798-1801)에 스핑크스 코를 폭파시켜 현재 스핑크스는 깨진 코를 갖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보다 50여 년 앞서 그려진 그려진 그림에 이미 스핑크스의 코는 깨져 있어 나폴레옹은 억울함을 면할 수 있었다.
'스핑크스', 1737년, 노든, 위키미디어
1737년 이집트를 여행한 덴마크의 해군 장교 노든(Frederic Louis Norden:1708-1742)이 남긴 스케치에 다행스럽게(?) 이미 코가 손상된 스핑크스의 모습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스핑크스의 없어진 코에 대해 선 이슬람의 우상파괴 정책으로 14세기경 파손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그런데 덴마크의 노든 보다도 50여 년 먼저 스핑크스를 그림으로 남긴 화가도 있다.
이번엔 네덜란드 화가다.
1698, 코르넬리스 드 브루인(위키미디어)
네덜란드의 화가 겸 여행가인 코르넬리스 드 브루인(Cornelis de Bruijn:1652-1727)이 1698년 그린 그의 작품 속 스핑크스의 코는 온전한 모습이다.
5,000여 년의 세월을 풍파에 시달리고 모래 속에 파묻혔다가 세상으로 나오길 반복하다 보니 스핑크스의 손상된 코에 대해선 여러 설들이 존재하는 가운데 아직 정확한 원인은 밝혀진 것이 없고 자연적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깨진 것이란 것만이 확인된 상태다.
코르넬리스나 노든 처럼 데이비드 로버츠보다 앞서 이런 류의 그림을 남긴 화가들은 여럿 있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비롯 폐허가 된 유적지지만 본래의 건축미를 그대로 살려 그려냈고 현지인들의 당시 일상을 엿볼 수 있도록 그림에 같이 담은 점 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집트와 누비아 여행 후 영국 로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렇듯 누군가 남긴 한 장의 그림이나 스케치가 역사를 되짚어 보는데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데이비드 로버츠의 그림을 보면 많은 유적지들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거나 물에 잠겨 있는 모습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모래에 묻히고 물에 잠긴 에드푸(edfu) 신전(좌)과 필레(Philae)신전(우)/,1838, 데이비드 로버츠(위키미디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당시 강대국들은 이런 문화적 유산을 자신들이 보존하지 않았다면 현재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어찌 생각하면 그랬을 수도 있었겠다 싶지만 센트럴파크 한편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오벨리스크를 보면서 그 모습이 참 생뚱맞다고 느낀 것은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태양신 숭배와 파라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오벨리스크가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 한 복판에 서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근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안에는 아스완 댐 건설로 아부심벨 신전과 같이 수장될 뻔한 이집트의 덴두르 신전(The Temple of Dendur)이 옮겨져 전시되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덴두르 신전,1838, 데이비드 로버츠(좌)/ 메트로폴리탄 전시실의 덴두르 신전(우)
이집트는 아직도 많은 자국 유산의 해외 유출의 반환을 요구하는 재판을 진행하고 있지만 강대국들은 들어줄 의사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수 천년의 세월 속에 손상되고 파괴되어 볼 품은 없어졌더라도 있어야 할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이런 유물들을 보러 수많은 관람객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다.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이유다.
파괴되고 손상되었지만 수 천년의 역사 위에 꿋꿋이 서 있는 멤논 거상
*아부심벨, 에드푸 신전, 콤옴보 신전의 현재 모습들. 데이비드 로버츠의 그림과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