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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Sep 12. 2022

44.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뉴욕 센트럴파크의 오벨리스크

이른 아침.

뉴욕의 센트럴파크는 아침운동인 사람들로 붐빈다.

센트럴파크에서 아침운동을 하는 뉴요커들

가끔은 새벽 콘서트가 열리기도 해서 이른 아침 운동을 나왔다고 생각하는 뉴요커들을 머쓱하게 만들기도 한다.

줄을 지어 달리고, 걷는 사람들 위로 보일 듯 말 듯 낯익은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온다.

센트럴파크의 오벨리스크


숲으로 가려져 걷는 각도에 따라 뾰족한 끝부분만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 저건 오벨리스크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그런데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런 생각도 잠시.

파리의 콩코드 광장, 이스탄불의 술탄 아흐메트 광장(Sultanahmet square), 바티칸의 베드로 광장에서도 보았던 오벨리스크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제야 '아! 이 오벨리스크도 비슷한 사연으로 여기 서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19세기 세계열강들이 분주하게 식민지나 약소국들의 유서 깊은 유적들을 줍줍 하던 그 시절 말이다.


예술의 보고인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뒤에 자리를 잡긴 했으나 고향인 이집트를 떠나 멀리 대서양 건너 남의 나라 고즈넉한 숲 속에 수천 년의 세월을 품고 외로이 서 있는 모습이 왠지 낯설다.


메트로폴리탄 안에서 바라본 센트럴파크의 오벨리스크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피라미드, 스핑크스 등과 함께 이집트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오벨리스크는 원래 태양신 숭배로 세워졌던 석조물로 4면에 파라오들의 업적을 빼곡히 기록하여 신전 입구에 쌍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신전 앞에 서 있어야 할 몇몇 오벨리스크들은 예상치 않은 장소에 우뚝 서서 마주치는 우리들을 의아하게 만들기도 한다.


현존하는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공식적으로 모두 31개라고 한다.

그중 42m로 가장 길이가 긴 '합셋수트 오벨리스크'는 미완성인 채로 세워지지 못하고 눕혀진 채 이집트 아스완의 채석장에 남아 있다.

31개 중 19개가 이집트가 아닌 외국에 있는데 이중에는 처음부터 외국에 세워진 것도 있고 국가 간에 준(?)것도 있다.

외국에 있는 19개 중 이탈리아가 11개로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데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가 끝나면서 이집트가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스완 채석장의 42m 합셋수트 오벨리스크


이스탄불과 바티칸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로마제국 통치하에 있을 때 옮겨진 대표적인 오벨리스크들이다.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는 주로 전차 경기장 중앙에 세워졌는데 영화 벤허의 유명한 전차 경기 장면을 상상해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스탄불의 술탄 아흐메트 광장에 있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5세기 투트모스 3세가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에 세웠던 것을 AD 390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콘스탄티노플의 경기장(Hippodrome)이었던 지금의 술탄 아흐메트 광장에 옮겨 놓은 것이다.


이스탄불의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좌), 바티칸의 오벨리스크(우)

같은 맥락으로 바티칸의 베드로 광장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는 일찌감치 칼리굴라 황제가 AD 37년에 가져온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헬리오폴리스(Heliopolis:현재 카이로의 북동쪽에 있던 고대 이집트의 도시)에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태양을 숭배하는 기념비로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록된 상형문자가 없어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대신 칼리굴라 황제가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리는 비문을 새겨 넣은 것이 아직 남아 있다.

만들어진 돌의 재질로 보아 기원전 30년 경일 거라는 추측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오벨리스크도 현재 바티칸 성당 근처에 있었던 전차 경기장에 세워져 있었는데 이곳은 베드로와 사도 바울을 포함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 한 곳이라고 한다.

교황 식스투스 5세가 1585년 현재의 베드로 광장 중앙 위치로 옮길 때까지 1500년을 지금은 사라진 전차 경기장을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이다.

원래 서 있던 자리는 현재 위치에서 300여 m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1000여 명의 사람이 옮기는데 5개월이 걸렸단다.




그러나 파리의 콩코드 광장과 뉴욕 그리고 런던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는 서구 열강들이 선물(?)로 받은 오벨리스크들이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Cleopatra's Needle)'이라 불리는 두 개의 오벨리스크가 있었다.

이 오벨리스크를 특별히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 부르는 것은 클레오파트라가 세운 신전 앞에 서 있었고 오벨리스크를 본 프랑스인들이 'Les aiguilles de Cléopâtre'라 불렀기 때문이다.

마치 샤모니의 뾰족한 몽블랑 전망대를 '에귀 뒤 미디(Auguille Du midi:정오의 바늘)'라고 명명했듯이 뾰족한 것엔 바늘이란 표현이 익숙한 프랑스 인들이다.

유명한 역사 삽화가 데이비드 로버츠(David Roberts:1796-1864)의 그림에 당시의 상황이 잘 그려져 있어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다행이다.

1838년 알렉산드리아의 두 개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오벨리스크, 데이비드 로버츠


기원전 1475년 투트모스 3세에 의해 헬리오폴리스에 세워졌던 오벨리스크를 기원전 12년 로마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신전 카이사레움(Caesareum) 앞으로 옮겨다 놓았다.

이 신전은 기원전 1세기 중반에 클레오파트라가 연인 시저를 위해 세운 신전이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대항해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남아 있는 안토니우스의 흔적을 모두 파괴시키라고 명령한다.

신전은 파괴되었고 신전 앞에 서 있던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는 땅에 거의 묻히다시피 하는 수난을 당했다.

그러나 무너져 있은 덕에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상형 문자들은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었다니 아이러니한 결과다.

두 오벨리스크의 운명은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수난의 연속이었다.

땅에 묻혀있던 오벨리스크는 런던으로, 온전하게 서 있던 오벨리스크는 뉴욕으로 떠나야 했으니까.


근세 열강들의 오벨리스크 날라오기는 프랑스가 선두에 섰다.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 앞에 서있던 2개의 오벨리스크중 하나를 1836년 콩코드 광장에 세워 놓은 것이다.

원래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부터 오벨리스크를 전쟁의 전리품으로 가져오자는 의견이 있었다.

로마 제국 시대부터 이미 황제들은 전리품으로 오벨리스크를 가져가곤 했다.

신흥 열강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원해줄 역사성이 필요했고 그런 점에서 고대 오벨리스크는 아주 적절한 상징적 유물이었다.



1832년 6월 오른쪽 오벨리스크가 철거되기 전의 룩소르 신전의 모습 (위키미디어)

특히 루브르의 초대 관장이었던 드농(Vivant Denon:1747-1825:루브르 드농관에 이름을 건 바로 그 사람이다)이 이집트를 여행한 뒤 이집트 정복의 상징으로 오벨리스크를 가져오자는 강력한 의견을 내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이집트 상형문자를 풀어내 로제타석을 해석해 낸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은 그중에서도 룩소르 신전 앞의 오벨리스크를 가져올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다른 신전과 달리 룩소르 신전은 신이나 파라오를 신격화한 것이 아니라 왕권의 회복을 기원하는 신전이었기에 더 의미가 있었을 듯하다.


원래는 뉴욕으로 간 '클레오파트라 바늘'이 프랑스로 올 거였으나 샹폴리옹의 주장으로 룩소르 것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1830년 이집트의 통치자였던 오스만 제국의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Pasha:1769-1849)는 수천 년된 유물을 선물로 프랑스에 준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1833년 파리에 도착하여 1836년에 현재의 콩코드 광장에 세워졌다.

룩소르에 남아 있는 나머지 오벨리스크는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이 프랑스 소유를 포기하기로 하여 현재 룩소르 신전 앞에는 짝 잃은 오벨리스크가 혼자 외롭게 서 있다.

룩소르 신전에 남아 있는 오벨리스크(좌), 파리 콩코드 광장으로 옮겨진 오벨리스크(우)

당시 총독이었던 무함마드 알리는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으로 이집트 마지막 왕조인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창시자다.

그는 외교의 한 수단으로 고대 이집트 문명의 엄청난 유산을 국력을 키우는데 아낌없이 이용했다.


오벨리스크를 세운 고대 이집트 문명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 7세에 와서 BC 30년에 멸망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의 측근이었으므로 그리스 혈통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여자 통치자들을 클레오파트라라고 불렀다.

우리가 아는 클레오파트라는 7세다. 알렉산더 대왕의 누이 이름도 클레오파트라라고 한다.

그 후 로마제국의 지배와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은 후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이었던 무함마드 알리 입장에선 고대 이집트 인들이 그의 직계 조상은 아니었던 셈이다.


무함마드 알리는 1819년 넬슨 제독의 해전 승리 기념으로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2개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중 묻혀 있던 오벨리스크를 주기로 한다.  

2천 년 가까이 땅에 묻혀 있다가 먼 이국으로 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보다 먼저 선물을 받았으나 영국 정부에서 운송비가 너무 든다고 오벨리스크 운반을 꺼리고 있는 사이 프랑스가 먼저 콩코드에 멋지게 오벨리스크를 세워 버렸다.

당시 저명한 의사인 에라스무스 윌슨 경이(Sir William James Erasmus Wilson) 현재가로 백만 파운드에 상당하는 비용을 내고 운반을 시작하였으나 배가 조난을 당하여 6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878년에야 런던의 템스 강변에 세워졌다. 오벨리스크 하단의 청동판에는 6명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런던 템즈 강변에 세워진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질세라 카이로 주재 미국 총영사도 나머지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을 받기로 한다.

1877년 당시 이집트 최고 통치자였던  이스마일 파샤(Isma'il Pasha:1830-1895)가 미국이 프랑스와 영국의 세력 싸움 사이에서 중립을 잘 지켜준다고 남은 '클레오파트라 바늘'을 선물로 주기로 한다.

미국은 철도 재벌인 반더빌트(William Henry Vanderbilt:1821-1885)가 현재가 250만 불에 상당하는 운반 비용을 지불하고 1881년 센트럴파크에 세우게 된다.

원래 이집트에서는 오벨리스크의 하단에는 수호신으로 원숭이 상을 설치하곤 했다.

뉴욕의 오벨리스크 하단은 검은 집게발로 장식되어 있다. 당연히 전갈인 줄 알았다.

그러나 검은 집게발은 '바다를 상징하는 게의 발(lobster claws)'이라는 설명이다.

 

오벨리스크 밑에는 타임캡슐을 묻었는데 1870년 미국 인구 조사, 성경, 웹스터 사전, 윌리엄 셰익스피어 전집, 이집트 가이드, 미국 독립 선언서 사본과 함께 작은 상자가 하나 더 묻혔다고 한다.

내용물은 알려지지 않은 채.

이 상자는 오벨리스크의 구매와 운송을 주선한 사람의 것이라는데 내용물이 알려지지 않은 이 작은 상자가 다른 무엇보다 더 궁금하다.

'센트럴파크 오벨리스크' 하단의 '랍스터 집게발' 장식


파리의 오벨리스크는 프랑스혁명 당시 공포의 상징이었던 기요틴이 서 있던 자리에 '화합(concord)'이란 뜻을 가진 광장에 세워져 있고, 바티칸 광장에는 태양을 경배하는 오벨리스크가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한 곳에 세워져 있다니 아이러니하다.


죽은 자를 기리고, 자신의 나라의 왕을 대표하며 신을 공경하는 경의의 표시로 세워졌던 수천 년 전 오벨리스크가 과연 그 본연의 의미에 걸맞은 장소에 서 있는 건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모습들이다.


첫 모습은 생뚱맞았으나 그나마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들은 둘 다 센트랄 파크와 템즈 강변 등 비교적 고즈넉한 곳에 세워져 있어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마저 든다.


무엇이던 자기 자리에 있어야 의미도 있고 보기도 좋다.

그들이 모시던 신과 왕을 기리는 유적이 남의 나라에 그저 오래된 돌덩이로 서 있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있을 곳에 있어야 한다는...


자신이 만들어지던 시대의 복장과는 많이 다른 복장을 한 이들이 자기 앞을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서 거대한 오벨리스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앞을 지나기가 조심스럽다.

한적한 오후 센트럴파크의 오벨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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