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북쪽으로 걷다 '5th Ave'와 82번가가 만나는 곳에는 간단히 'The Met'로 부르는 뉴욕 최대의 박물관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가 자리하고 있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뮤지엄의 'The American Wing' 섹션 771호실에는 한 여인의 초상화가 관람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플로렌스 출신 미국인 화가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1856-1925)의 작품이다.
'The American Wing' 앞 로비
그림의 제목은 '마담 X'.
제목이 주는 첫인상은 매우 미스터리하다.
지나치리 만큼 하얀 피부의 여인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초상화다.
같이 전시되어 있는 다른 초상화의 여인들과 비교해도 너무 백옥 같은 피부는 현실감마저 없어 보인다.
아무 장식도 없이 깨끗한 뒷 배경까지 고려한다면 어떤 점이 미스터리한 것인지 살짝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메트로폴리탄 사전트 룸에 전시된 '마담 X'(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은 처음 대중에게 공개될 때부터 주인공의 이름을 익명에 붙이고 '마담 ***의 초상화'라는 제목으로 1884년 파리의 살롱전에 전시된 작품이다.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뭔가를 보여주고 싶고 남기고 싶은 마음에 그렸을 텐데 왜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까?
그런데 더 희한한 일은 그림 속 주인공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파리 사교계에 유난히 하얀 피부와 외모로 잘 알려져 있던 '마담 고트로'였다.
'마담 X', 1884년, 존 싱어 사전트, 메트로폴리탄
살롱전에 전시되었던 원래 작품에선 주인공의 드레스 오른쪽 어깨끈이 흘러내린 고혹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가슴이 거의 드러난 드레스도 드레스지만 드레스 어깨끈이 밑으로 흘러내린 모습은 어찌 보면 누드 보다 더 유혹적일 수도 있다.
바로 이점을 많은 비평가들이 혹평을 하고 관람객들도 다 알아보는 사교계의 유명 인사인 주인공이 교양 있는 귀부인의 자태가 아닌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비난이 쇄도했다.
1884년 살롱전에 출품되었던 원본 사진(위키미디어)
화가와 모델은 각자 이 작품으로 명성도 얻고 신분 상승도 기대했지만 혹평에 견디다 못한 화가는 런던으로 떠나버렸고 파리 사교계의 꽃이 되고 싶었던 모델은 많은 스캔들과 추문으로 사교계에서 존재감을 잃게 되었던 당시에는 완전 실패한 작품인 듯했다.
이렇다 보니 초상화는 본인이나 가족이 소장하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마담 고트로의 가족들이 소장을 거부하여 결국 작가 사전트가 소장하고 있다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소유권을 넘기게 되었다고 한다.
혹평에 시달린 그림이 어찌 미국판 모나리자라는 애칭으로 뉴욕 최대의 뮤지엄에 전시되어 있는지 그 모든 걸 알아보려면 도대체 이 여인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보아야겠다.
주인공 버지니 아멜리 아베뇨 고트로(Virginie Amélie Avegno Gautreau: 이하 마담 고트로:1859-1915)는 1859년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난 프랑스 귀족 가문의 후손(Creole:크리올, 주로 식민지 지역에서 태어난 유럽계 조상의 자손들을 이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미국 남북전쟁에서 사망하자 그녀의 어머니는 8살인 그녀를 데리고 1867년 파리로 이주한다.
1878년 19세의 마담 고트로(위키미디어)
창백하리 만치 하얀 그녀의 피부와 조각 같은 프로필로 파리 사교계의 주목을 받았던 그녀는 자신의 하얀 피부색과 조화를 이루는 라벤더 파우더를 뿌리고 머리와 눈썹을 염색하여 자신의 피부와의 대조를 극대화시켰다고 한다.
일종의 'professional beauty'를 지향했던 것.
그 덕(?)에 자신보다 20살 많은 은행가와 결혼에 성공하게 되고.
그러나 혼외정사 등 많은 가십이 그녀를 항상 따라다녔는데 그녀는 개의치 않고 파리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하는 것을 오히려 즐겼던 듯싶다.
그런데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화가 사전트는 그녀의 유명세에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그려낸다면 자신도 화가로서의 위상을 높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고 한다.
화가인 사전트 쪽에서 먼저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지인을 통해 수 차례 그녀에게 청을 넣었고.
사전트의 습작들
겨우 허락을 받은 사전트는 그녀의 성(Chateau)이 있는 브르타뉴로 2년여를 손수 출장을 나가 밑 작업을 했는데 그녀는 전혀 화가에게 협조할 의사도 없는 게으른 모델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