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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Oct 04. 2020

29. 뉴욕에서 만난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Adele Bloch-Bauer)



뉴욕의 '센트럴 파크' 옆 82번가에는 뉴욕 최대의 박물관 'The Met(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가 자리하고 있다.

'The Met'에서부터 북쪽으로 뉴욕의 부촌인 Upper East Side의 110번가 까지를 뉴요커들은 '뮤지엄 마일(Museum Mile)'이라 부른다.

명칭대로 이곳에는 구겐하임(Guggenheim Museum)을 비롯 다양한 뮤지엄들이 나열해 있다.

그런데 '뮤지엄 마일'? 어디서 들어 본 듯한 명칭 아닌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걸었던 '로열 마일(Royal Mile:https://brunch.co.kr/@cielbleu/126 참조)'이 떠올랐기 때문인가 보다.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다 보면 같은 이름의 지명, 비슷한 양식을 마주칠 때가 많아 데자뷔 같은 경험을 심심치 않게 하게 된다.

유럽을 떠나 신 대륙으로 이주해 온 미국인들의 조상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온 이들이 대부분이라 늘 마음 한 구석에 고향이나 뿌리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는 듯하다.


코로나 이전 여유로운 센트럴 파크

 

82번가의 'The Met'


이번 이야기는 뮤지엄 마일의 시작점인 82번가의 'The Met'를 지나  86번가에서 만나는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와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에 관한 이야기다.


노이에 갤러리와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


노이에 갤러리의 첫인상은 건물 앞에 입장을 기다리며 서 있는 긴 줄만 없다면 뮤지엄 같아 보이지 않고 뉴욕의 어느 부자의 저택처럼 보이는 건물이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

윌리엄 스타 밀러(William Starr Miller)라는 부호가 프랑스의 루이 13세 스타일로 1914년 지은 집이라고 한다.

건물 벽에 걸린 '로날드 로더'의 명패와 '노이에 갤러리' 사인

세월이 흘러 이 집은 1994년 아트 딜러인 사바스키(Serge Sabarsky)와 세계적 화장품 회사인 에스티 로더의 아들이자 예술작품 수집가인 로날드 로더(Ronald Lauder)의 소유가 되었다. 로날드 로더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에서 이민 온 유대인 집안이다. 이들은 이 저택을 완전히 리모델링하였고 2001년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로 오픈하였으며 독특한 운영 방식으로 사랑받는 갤러리다.


갤러리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곳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작가들의 예술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뉴욕의 중심가에 자리 잡은 가장 유럽적인 색채를 가진 갤러리다.

노이에 갤러리에는 '오스트리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가 클림트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단연 으뜸은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여인의 초상화다.

노이에 갤러리의 전시실
'The Woman in Gold', 1907, Klimt, Neue Galerie


초점이 정확지 않고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눈을 백치미라고 종종 얘기하곤 한다.

'The Woman in Gold'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바로 그런 눈을 가진 부유한 유대인 집안의 안주인으로 이름은 아델레, 클림트의 많은 뮤즈 중 한 사람이다.


17년 연상인 아델레의 남편 페르디난드 블로흐(Ferdinand Bloch)도 유대인 부호였다. 당시에는 부자들이 그들의 아내나 자녀들의 초상화를 유명한 화가들에게 의뢰하여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의 의뢰로 클림트는 아델레의 초상화를 두 점 그렸다.

노이에가 소장하고 있는 것이 1907년에 그린 첫 번째 작품이고 1912년에 두 번째 작품이 완성되었다.

 

아델레의 초상 2,1912, 클림트, 개인 소장

1925년 아델레는 뇌수막염으로 4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고 남편과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아델레의 남편은 영국으로 피신을 하게 되고 나치는 유대인 부호들이 소유한 예술 작품들을 몰수하여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벨베데레(Belvedere  Museum) 뮤지엄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벨베데레 미술관의 아름다운 정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델레는 자신 소유의 작품을 벨베데레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작품은 그녀가 아닌 그녀 남편의 소유였다고 한다.

후손이 없자 남편 소유였던 작품들은 남편의 유언대로 그의 조카들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치의 탄압으로 오스트리아를 떠나 미국에 정착하여 살던 조카들은 이 사실을 수 십 년 후에 알게 되었고 1998년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작품 반환 소송을 벌이게 되었다.


벨베데레 측이 아델레의 유언대로 이 작품이 벨베데레에 남는 것이 맞다면서 반환을 강력히 거절하자 1998년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불가능할 것 같은 법정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국보급인 클림트의 작품을 지키려는 오스트리아 정부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시작한 법정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행했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는 법정 싸움이 되었다.


이들의 법정 투쟁 스토리는 2015년 영화 'Woman in Gold'로도 만들어졌다.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에 빛나는 헬렌 미렌이 아델레 남편의 조카인 '마리아 알트만'으로 분하여 열연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내가 마리아가 된 거 같은 일체감을 느끼며 보았던 영화다. 우리도 해외에서 못 돌아오고 있는 선조들의 고귀한 작품들이 많지 않은가?


당시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던 마리아 알트만은 벨베데레가 자신의 삼촌 소유인 클림트 작품 5개를 소유하고 있으니 그의 유언대로 자신에게 클림트의 작품을 반환해야 한다고 맞섰고 오스트리아의 벨베데레는 강경하게 반환 요구를 거절했으나 8년에 걸친 재판은 2006년 마리아의 승리로 끝났다.

 

이들의 재판 과정 내내 아델레의 초상화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로날드 로더는 노이에 갤러리에 영구적으로 전시할 것이라는 조건과 함께 1억 3천5백만 달러(1500억)에 이 그림을 사들였다. 이렇게 하여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대서양 건너 뉴욕의 노이에 갤러리에 새 안식처를 갖게 되었다.


이 초상화의 제목 'The Woman in Gold'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나치가 자신들의 불법 수집을 감추려고 그림의 주인공 이름을 지워버렸다는 설도 있고 당시 비잔틴의 화려한 모자이크 기법에 빠져 있던 클림트를 떠 올리도록 그리 붙였다는 설도 있다.

진위야 어떻든 그림의 내용과는 잘 어울리는 타이틀이다.


클림트의 두 번째 아델레 작품은 2006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8천8백만 달러에 새 주인을 맞았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오프라 윈프리였다.

그녀는 이 작품을 2014년부터 뉴욕의 MOMA에 장기간 전시하도록 하였는데 2016년 중국인 부호에게 1억 5천만 달러에 팔았다고 한다. 대단한 투자였다.  


'The Kiss',1907 ,클림트,벨베데레(좌),'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1901,클림트,벨베데레(우)


노이에 갤러리에서 클림트와 에곤 쉴레 등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니 비엔나를 방문했던 생각이 절로 난다. 그중에서도 비엔나를 대표하는 뮤지엄 중 하나인  벨베데레 뮤지엄을 방문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벨베데레는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가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유명세를 너무도 타던 '키스'보다 더 와닿던 작품이 있었다. 바로 클림트의 다른 작품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다.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받아서 인지 작품 속 유디트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화집이나 사진 등으로 많이 접했던 작품이었으나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고 잘린 그의 목을 한편에 들고 희열에 차 있는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직접 대하니 말로 설명이 어려운 복잡한 감정은 거의 충격 수준이었다.


다른 작품들 속의 적장의 목을 자른 어린 유대인 처녀의 모습은 대부분 겁에 질리거나 머뭇 거리는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클림트의 작품은 더욱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1599, Caravaggio, Palazzo Barberini, Rome


그런데 이 작품의 유디트의 모델이 바로 아델레였다.

초점 없는 눈 빛만 보아도 쉽게 그녀임을 직감할 수 있지만 그녀의 목을 장식하고 있는 '초커(Choker)' 스타일의 화려한 목걸이는 남편이 아델레에게 준 결혼 선물로 아델레의 트레이드 마크다.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유명한 클림트지만 뉴욕에 있는 아델레의 초상화는 클림트의 다른 작품 속 여인들과는 다른 우아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보기 좋은 작품 중 하나다. 왜 이 작품을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라는 애칭으로 부르는지 이해가 간다.

화려한 금빛 옷으로 치장한 아델레는 이제는 노이에 갤러리의 안방마님이 되어 대서양 건너 유럽에 대한 향수를 가진 뉴요커와 방문객들을 우아한 모습으로 맞이하고 있다.  


노이에 갤러리의 부티크 샾
카페 사바스키 입구와 실내

작품들을 감상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면 예쁜 부티크 샾과 카페가 기다리고 있다.


'Cafe Sabarsky'다. 뉴요커들에게 무척 사랑받는 카페다.


내부 장식은 화려하진 않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요소들이 즐비한 곳이다. 우선 조명은 오스트리아의 대표 건축가인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의 작품이고 가구는 아돌프 루스(Adolf Loos), 그리고 또 한 명의 유명 건축가인 오토 바그너(Otto Wagner)의 패브릭으로 완벽하게 장식된 카페는 우아함마저 느끼게 한다.


카페 한 편에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피아노 메이커인 뵈센도르퍼(Bösendorfer)의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어 무엇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특별한 날에는 연주도 한다.

게다가 미슐랭 스타 셰프가 준비하는 간단한 식사와 오스트리아의 대표 디저트 '자허 토르테(Sacher Torte)'까지 맛볼 수 있으니 거의 완벽한 카페다.

'자허 토르테'는 '자허'라는 사람이 만든 초콜릿 케이크란 뜻이다. 토르테는 독일어로 케이크란 뜻이다.

카페 사바스키에서 맛보는 자허 토르테

요즘은 유명 베이커리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자허 토르테'이지만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독특한 오스트리아식 초콜릿 케이크가 만들어진데도 우연찮은 계기가 있었다.


19세기 초 식당에서 조수로 일하고 있던 '자허(Sacher)'는 수석 셰프가 병이 나는 바람에 그 대신 장관의 디저터를 만들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허가 만든 이 케이크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더니 마침내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디저트 케이크가 되었다.

일반 초콜릿 케이크와 다른 점은 폭신한 감촉의 속 케이크는 레이어 사이에 살구 잼을 발라 주고 케이크 겉은 진한 다크 초콜릿으로 아이싱을 하면 된다. 서빙할 때는 휘핑크림을 곁들이는 것이 특징이다.


비엔나의 데멜 베이커리와 데멜의 'Eduard-Sacher-Torte'


비엔나에는 18세기부터 현재까지 왕실에 제빵을 납품하는 '데멜(Demel)'이라는 오래된 베이커리가 있다.

'자허 토르테'의 인기로 자허 호텔까지 운영하던 자허 자손들은 파산의 위기를 맞게 되자 '데멜'에서 일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Eduard-Sacher-Torte'라는 이름으로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후에 자허 호텔을 인수한 사람이 '자허 토르테'의 원조를 따지자 1954년 원조에 대한 논란은 법정으로 비화되고 1963년 원조는 '자허 토르테'라는 판결이 나와 자허 호텔에서 파는 '자허 토르테'만이 오리지널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샴페인(https://brunch.co.kr/@cielbleu/77 참조)이 프랑스의 샹파뉴 지역에서 생산되는 스파클링 와인에만 쓰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대신 데멜의 초콜릿 케이크에는 삼각형 모양의 장식 안에 'Eduard-Sacher-Torte'라고 쓰고 판매하도록 하였다.

비엔나에서는 데멜의 'Eduard-Sacher-Torte'를 맛보았는데 뉴욕에서는 '자허 토르테'를 맛보다니 세계는 점점 'Small World'가 되어 간다는 말이 실감 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작가들의 그림을 감상하고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디저트를 비엔나커피와 같이 맛볼 수 있는 곳.

노이에 갤러리에서는 뉴욕의 한 복판에서 유럽을 느껴보는데 부족함이 없다.

뉴욕의 한 복판에서 유럽에 대한 노스탤지어 적인 감흥을 맛보려는 사람들이 이 카페를 즐겨 찾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노이에 갤러리와 카페 사바스키는 늘 대기 줄이 길다.


노이에 갤러리에 외벽에 걸린 아델레의 포스터


아델레의 초상화를 감상하며 그녀의 옛집 비엔나의 벨베데레 뮤지엄을 회상하고 사바스키 카페에서 자허 토르테를 먹으며 비엔나의 중심가 '데멜'에서 먹던 'Eduard-Sacher-Torte'를 떠올리게 되니 대서양을 건너온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의 포스가 느껴진다.


가을날, 베이커리에 진열된 '자허 토르테'를 보면서 나의 추억의 나래는 유럽과 뉴욕을 바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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