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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Jan 20. 2019

2.5촌 언니 엘리자베스 1세에게 참수당한 비운의 여왕

매리 스튜어트(Mary Stuart)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의 구시가지에는 로열 마일(Royal Mile)이라는 유명한 길이 있다.

이름에 걸맞게 왕가의 성에서 시작해서 왕가의 성에서 끝나는 길이다.

에든버러의 랜드마크인 에든버러 성에서 왕실 궁전인 홀리 루드 하우스 궁전까지 이어지는 1.8km에 이르는 로열 마일은 지금은 왕가의 사람들보다는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길이다.

에든버러 성
로열 마일
홀리 루드 하우스 성


길을 걷다 보면 스코틀랜드 답게 여러 가문(Clan)의 체크 문양 관련 상품들이 진열된 기념품 가게들과 스코틀랜드 전통 카페 또는 술집이라 할 수 있는 펍(Pub)들이 성업 중인가 하면 왕관을 씌어 놓은 것 같은 지붕을 하고 있는 성 자일스 대 성당(St. Giles Cathedreal)이 있고,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의  묘지도 볼 수 있으며 유명하다는 애프터 눈 티 가게도 있어 걷는 길이 아주 흥미롭다.

그중 'Deacon Brodie's Tavern'이라는 주점은 흥미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진 곳이다. 자랑스럽게 그 이야기를 주점 외벽에 써 놓았는데 내용은 이렇다.

우리도 잘 아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모델이 된 인물이 18세기 에든버러 바로 이 동네에 살았던 윌리엄 브로디(William Brodie)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저자(Robert Louis Stevenson)는 에든버러 출신이다. 윌리엄 브로디는 부유한 집안사람으로 주간에는 존경받는 시민이었으나 밤에는 갖은 악행을 저질러 1788년 자일스 성당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인물이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교수형에 처해진 교수대는 브로디 자신이 디자인한 것이라고 하니 이런 악연도 있나 싶다. 가게 이름은 바로 그의 이름을 빌린 것이고.

로열 마일에서 옆길로 잠시 빠지면 해리 포터가 탄생한 카페(Elephant Cafe)도 가 볼 수 있다. 이 곳은 조앤 롤링이 무명시절 카페 한 구석에 앉아 해리 포터를 집필했던 곳으로 현재는 그 어느 곳 보다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듯하다.


스코틀랜드 각 가문(clan)의 다양한 체크 패턴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브로디 주점
왕관 모양의 지붕을 한 성 자일스 성당
교회 묘지에 있는 아담 스미스의 묘지와  조안 롤링의 단골 카페 엘리펀트 하우스


박물관 앞에 걸린 전시 포스터

거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라 있다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 거리에는 스코틀랜드 국립 박물관도 있는데 건물 앞에 단아하고 고귀한 느낌의 여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스코틀랜드 역사에 한 획을 긋고 있는 이 여인은 여왕 매리 스튜어트(Mary, Queen of Scots)다. 에든버러 성에도 홀리 루두 하우스 성에도, 스코틀랜드 관련 책자 등 어딜 가나 보게 되는 매리 스튜어트 여왕.

과연 그녀는 어떤 여왕이었는지 궁금해진다.

파리를 구경하면서 앙리 4세를 기억해야 한다면 에든버러에서 그 주인공은 단연코 매리 스튜어트다.


 

스코틀랜드의 매리 스튜어트(Mary Stuart:1542-1587). 그녀 는 누구?

    

매리 스튜어트, Francois Clouet,1561

키 1미터 80에 사슴처럼 긴 목을 가진 데다 피부까지 하얗다 못해  투명하여 미인의 조건을 두루 가진 여인이다. 게다가 그녀는 왕족의 혈통까지 이어받아 세상에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천일의 앤'의 주인공인 헨리 8세의 손녀 조카뻘이 되는 그녀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왕위를 계승하는 초고속 왕위 즉위식을 하게 된다. 그녀가 가진 조건을 듣다 보면 정신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서양에서도 '호사다마'란 우리의 옛말은 예외가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롤러코스터 같은 그녀의 인생 여정은 그녀가 지니고 있는 화려한 배경이 무색할 만큼 처절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가 가까운 친척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참수형을 당한 비운의 여왕이기 때문이다.

 ‘피의 매리(bloody Mary)’라는 무서운 별칭으로 불리는 매리 1세(1516-1558)와 혼돈할 수도 있는데 ‘피의 매리"는 헨리 8세와 첫 번째 부인(Catherine of Aragon) 사이에서 나은 잉글랜드의 매리 1세 여왕이다.

그런데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매리 스튜어트와 매리 1세, 엘리자베스 1세는 같은 할머니를 가진 가까운 친척 지간이다. 그런데 어찌하다 이렇듯 막강한 배경을 가진 매리 스튜어트가 인척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참수형을 받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는지 그녀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린리스고 성 안뜰


1542년 12월 어느 날, 에든버러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린리스고(Linlithgow) 성에서 제임스 5세 왕과 프랑스인 왕비 사이에 공주가 태어났다. 불행히도 왕은 공주가 태어난 지 6일 만에 세상을 뜨고 이 공주는 즉시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그녀가 평범한 집안의 딸이었다면 오히려 그녀의 아름다움으로 사랑받는 인생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생후 6일 만에 왕이 되어버린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어쩌면 이미 예견된 건지도 모를 일이다.

매리 여왕의 부모(제임스 5세와 마리 드 기즈)


스코틀랜드와의 연합을 노심초사하던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매리가 6개월이 되었을 때 자신의 어린 아들(에드워드 6세)과  혼인시키기로 협정을 맺어 버렸다. 매리 스튜어트는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의 손녀딸이다. 그러니 헨리 8세는 그녀의 삼촌 할아버지가 되는 셈.

결국 가까운 친척간의 혼인을 추진한 것인데 '협정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스코틀랜드를 집어삼키려는 헨리 8세의 야욕이 드러나자 프랑스의 명문 귀족이었던 매리의 어머니(마리 드 기즈:Marie de Guise)는 프랑스에 지원을 청하게 된다.

그 결과 헨리 8세와의 협정을 깨고 프랑스 앙리 2세(카트린느 드 메디치의 남편(https://brunch.co.kr/@cielbleu/18 참조))의 아들 프랑수와 2세와 혼인시키기로 한다.


5살이 된 매리는 1547년 프랑스로 가게 되고 이후 12년간 프랑스에 거주하게 된다. 프랑스 궁에서 왕실 교육을 받고 자란 매리 스튜어트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어여쁜 공주였다고 한다. 그녀는 44년 인생에서 12년의 프랑스 생활, 14년의 스코틀랜드 거주, 그리고 가장 많은 18년을 잉글랜드에서 보냈다.

1558년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데 그만 다음 해인  1559년 앙리 2세가 승마 시합 도중 사고로 세상을 뜨자 남편인 프랑수와 2세가 왕에 즉위하게 된다. 매리는 프랑스의 왕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원래 건강하지 못했던 프랑수와 2세가 다음 해인 1560년 사망하자 다음 해인 1561년 8월 매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온 스코틀랜드는 정치나 종교 상황이 혼란의 시기였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악운이 겹친다.


홀리 루드 하우스 궁전
홀리 루드 성문에 새겨진 유니콘과 사자상(스코틀랜드는 사자를 이긴다는 유니콘을 국가의 동물상징으로 했다. 두 왕국의 앙금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매리는 로열 마일에 있는 홀리 루드 하우스 성에서 은둔의 시간을 보내던 중 4년 뒤인 1565년 홀리 루드 하우스 성에서 친척인 단리(Henry Stuart, Lord Darnley)와 두 번째 결혼을 한다. 단리도 매리와 같은 할머니를 둔 사촌지간으로 당시는 왕권을 지킨다는 명분 하에 근친혼은 당연스레 받아들이던 시절인지라 특이한 경우는 아니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왕가와 잉글랜드 왕가의 결합이란 점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심기를 편치 않게 했다. 왜냐면 엘리자베스 1세는 어쨌건 왕족이 아닌 '천일의 앤' 앤 볼린 (Anne Boleyn)의 핏줄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단리가 180cm가 넘는 장신이라고 엘리자베스 1세는 그를 '롱다리'라고 부르곤 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 자신도 당시 키로는 큰 키인 170cm였다는데 말이다.

 

매리 여왕과 두번째 남편 단리(좌), 매리의 수석 비서 리치오(우)

홀리 루드 성의 북서쪽 탑에는 '매리 여왕의 방'이 있는데 이 곳은  스코틀랜드 역사상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1566년 3월, 그녀의 남편 단리가 질투심(임신 중이던 매리를 유산시켜야 왕위를 자신이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으로 그녀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라는 음모설도 있다. 아무리 왕족 간의 혼인이라지만 이럴 수가 있나 싶다.)으로 매리의 수석 비서였던 리치오(David Rizzio)를 그녀 앞에서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이 사건으로 단리가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 후 1566년 6월에 태어난 아들이 바로 제임스 6세(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다. 에든버러 성에는 제임스 1세가 태어난 '매리 여왕의 방'이 전시되어 있다.


 

프린세스 스트리트 가든에서 바라본 에든버러 성


제임스 6세(좌)와 에든버러 성에 있는 그가 태어난 매리 여왕의 방(우)



다음 해 단리는 살해된 채로 발견되고 그의 살해 용의 선상에 있던 보스웰 백작이 매리를 강간하고 결혼을 강요하자 1567년 5월 결국 매리는 커밍아웃하지 못하고 추문을 막기 위해 할 수 없이 결혼을 승낙하지만, 이 결혼으로 매리에 대한 국민들의 인기는 추락하게 된다. 단리의 살해 배후 인물로 의심받던 보스웰 백작과 결혼을 발표하자 매리가 단리를 죽인 거 아니냐는 루머까지 돌게 되고 정국은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매리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결국 왕위를 어린 아들인 제임스 1세에게 물려주는 조건으로 목숨은 건지나 반란군을 피해 가까운 친척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녀 곁으로 거처를 옮기지만 이것이야말로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매리 1세(피의 매리)(좌), 엘리자베스 1세(우)


자신의 도움을 기대하고 찾아온 어린 여왕을 18년간 감금 생활을 시키고 매리의 남편이 죽자 그녀가 또 다른 왕족과 결혼을 계획할까 봐 노심초사하던 엘리자베스 1세는 그녀에게 반역죄를 씌어 1587년 참수형에 처한다.


매리 여왕의 처형 장면

왕권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던 엘리자베스에게는 근심의 뿌리를 뽑아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을터. 잉글랜드의 여왕에게 자신들의 여왕이 참수당한 역사를 보는 스코틀랜드 인들의 마음은 편치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비운의 왕비의 자취를 찾고 많이 홍보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왕위 계승권을 가진 이유로 여기저기서 휘둘린 그녀의 삶을 보면 안타깝다 못해 답답한 마음까지 들지만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보거나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이 여왕을 측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이래저래 아름다운 스코틀랜드의 여왕은 사후 500여 년이 되어 오는 에든버러 여기저기에 아직도 살아 있는 듯 그녀의 족적을 남기고 있었다.




매리 여왕과 그의 아들이 대관식을 한 스털링 성(Stirling Castle)

스털링 성 입구(오른편에 스코틀랜드 독립영웅 로버트 더 부르스 왕의 동상이 있다.)

에든버러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걸리는 스털링 성은 잉글랜드와의 독립전쟁과 스코틀랜드 왕가의 흥망 등 파란의 역사를 함께 한 성이다. 성 입구에는 스코틀랜드 독립 영웅 로버트 더 부르스의 동상이 서 있고 앞으로는 독립 영웅 윌리엄 왈라스(브레이브 하트의 실제 주인공)의 기념탑을 내려다보는 요지에 서 있다. 매리 스튜어트는 이 곳에서 왕위에 올랐으며 그녀의 아들 제임스 1세 또한 생후 9개월에 이 성의 예배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 성은 오래전부터 'Key to Scotland'로 불리며 스코틀랜드를 지배하기 위해선 반드시 가져야 하는 중요한 성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인가. 성 근처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최초로 싸운 배넉번(Bannockburn) 전투지가 있다.


스털링 성에서 내려다본 전망. 멀리 독립영웅 윌리엄 왈라스 기념탑이 보이고, 오른편으로는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 한 획을 그은 배넉번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 펼쳐져 있다.




그들만의 처절한 왕위 계승 암투


헨리 8세가 어린 매리와 약혼을 강행했던 그의 유일한 아들은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무어(Jane Seymour)와의 사이에 얻은 에드워드 6세였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10세에 즉위하였으나 병약하여 일찍 사망하였다. 그는 자신과 혼인하지 않은 매리를 늘 원망했다고 한다. 자손이 없이 에드워드가 세상을 뜨자 다시 왕위 계승권을 놓고 암투가 벌어지는데 권력 싸움에 희생된 또 한 명의 여왕이 있다.

런던의 내쇼날 갤러리에 가면 유독 눈길을 끄는 폴 들라로쉬 그림의 주인공, 헨리 7세의 증손녀 '레이디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가 바로 그녀다.

에드워드 6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그녀의 재임기간을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1553년 7월 10일부터 1553년 7월 19일까지 단 9일의 여왕이었다. 가까운 친척이 되는 매리 1세에 의해 그녀 또한 꽃다운 나이 16세에 참수당했다. 내쇼날 갤러리에 있는 폴 들라로쉬의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그녀의 무고함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흰 드레스가 보는 이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작품이다.

에드워드 6세(좌), 참수형을 받는 레이디 제인 그레이,Paul Delaroche,1833, National Gallery, London(우)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참수시키고 즉위한 매리 1세는 동생의 목숨을 빼앗고 즉위한 것 치고는 너무나 짧은 5년의 재임 끝에 병(난소암이었다는 설이 있다)으로 사망하고 드디어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가 열린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58년부터 1603년까지 재임하면서  1587년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가까운 친척인 매리 스튜어트를 처형함으로써,  친척 지간인 네 여인은 모두 왕위에 올랐으나 각기 엇갈린 운명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인생과 역사는 때때로 기막힌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지 않던가.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한 이가 바로 매리 스튜어트의 아들이었으니 말이다.  매리 스튜어트의 아들은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로, 동시에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비록 두 왕국은 분리된 상태로 왕가는 통일 (Union of the Crowns) 되었으나 그 후로도 100년의 세월이 더 흐른 뒤에야 비로소 왕국도 통합(Union of the Kingdoms)되어 대영제국 (United Kingdom)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가운데 인물이 제임스 1세다)', 폴 들라로쉬,1828,루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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