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iel Bleu Aug 21. 2022

43. 다시 뉴욕, 이번에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품 안에 


일 년 만에 다시 찾은 뉴욕.


노 마스크로 거리를 누비는 뉴요커들과 떼 지어 조깅하는 센트럴 파크의 인파들을 보면 이곳의 코비드는 거의 사라진 듯한 분위기다.

그러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뮤지엄 같은 곳에선 사뭇 다른 분위기다.

마스크 착용이 의무는 아니지만 실내에서의 마스크 착용이 주는 심리적 안도감은 나만의 느낌만은 아닌 듯했다. 


정해진 시간과 일정으로 바쁜 마음으로 작품을 감상해야 했던 이에게 마음 놓고 느긋하게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남의 이야기 같이 느껴지곤 했던 뮤지엄 방문.

곰곰이 생각하다 이번엔 아예 메트로폴리탄의 멤버가 되기로 결정했다.

충분치 않은 방문 일정을 고려한다면 조금은 과한 결정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단히 잘한 결정이었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시간 날 때마다 메트(메트로폴리탄 뮤지엄)를 안방 드나들듯이 드나드는 특권을 마음껏 누렸으니 말이다.


그날그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느긋하게 감상하고 또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 작품을 감상하는 마음에 여유도 생기고 체력도 생기고 메트의 관람이 이렇게 편할 수 있구나 하는 마음에 발걸음마저 가벼웠다.

게다가 멤버들에게는 뮤지엄 오픈전 입장 혜택도 주어지니 보고 싶은 작품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나만이 즐길 수 있다는 것 또한 가슴을 설레게 하는 혜택이었다.




그리하여 찾은 메트.

역시 그곳에는 흥미 있는 전시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Chroma: Ancient Sculpture in Color'


전시실 입구의 안내 포스터

늘 궁금해하고 말로만 들어왔던 고대 조각들의 채색 전이다.

그리스나 로마의 신전들이나 고대 조각 작품들이 원래는 화려하게 채색되었다는 설명을 자주 듣곤 했었다. 

어쩌다 채색되어 복원된 고대 작품들을 보면 익숙지 않은 모습에 색 바랜 대리석이나 라임스톤 등의 현재 모습이 낫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채색되어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 어쩐지 생뚱맞고 어색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채색된 본래의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는 고대 조각상들을 보니 과연 고대인들은 이런 화려한 채색을 보고 어떤 감흥을 받았을까 궁금해진다. 

염료가 귀한 시절이었으니 채색된 조각품이나 신전의 화려한 장식들을 바라보던 고대인들의 경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메트 1층 그리스 로마 관의 전시실로 들어서니 입구에 단아하게 서 있는 여인의 동상. 

복원된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기원전 1세기~기원 후 1세기에 만들어진 아르테미스 조각상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이 조각상은 발굴 당시 채색의 보존 상태가 좋아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미술사가인 요한 요아힘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1717-1768)이 고대 조각상들의 색채가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설명하는데 자주 예를 들곤 했던 작품이다. 


인류 최초의 인공 염료로 알려진 '이집트 블루(Egyptian Blue)'가 사용된 조각상으로 '이집트 블루'는 로마시대 이후에는 제조법이 잊혀진 색이었다가 19세기 초에 와서 과학자들이 다시 제조법을 찾아낸 색이다. 


특별히 이름 붙은 블루 중 '클라인 블루(Klein Blue)'가 있다. 

'이집트 블루'는 '클라인 블루' 보다는 많이 밝은 톤이다. 

블루라고 다 같은 블루가 아닌 셈. 

색상의 스펙트럼의 다양함을 생각하면 고대 작품의 복원이 얼마나 까다롭고 복잡한지 짐작이 간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것이다.

화살통을 메고 있는 뒷모습이 영락없는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다.


전시된 작품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그리스의 아이기나(Aigina) 섬에 있는 아파이아 신전(Temple of Aphaia)에서 가져온 궁수의 조각상이다.

2500년 전 그리스 궁수 조각상

이 조각상은 채색과 의상의 화려함으로 사진상으로는 몇 번 보았었지만 실물을 직접 보니 채색의 화려함과 섬세함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기원전 500년 경 지어진 신전에 채색되어 있던 모습인데 2500년 전 의상이라고 보기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요즘도 레깅스가 한창 유행인데 2500년 전 그리스의 궁수는 이토록 화려한 색상의 레깅스를 입고 전쟁터를 누볐다니 고대인들의 예술 감각은 현재보다 한 수 위인 듯하다. 

피카소가 2500년 전 라스코 동굴에 그린 원시인들의 벽화를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동안 나아진 게 하나도 없군!'이라는.


이 궁수는 트로이 전쟁의 도화선이 된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란 해석도 있는데 이는 궁수가 조각되어 있던 신전의 페디먼트(pediment: 건물 입구의 두 지붕이 만든 삼각형의 벽면)의 내용이 트로이 전쟁을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파이아 신전
아파이아 신전 서쪽 페디먼트의 부조(위키미디어)
멋진 레깅스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2500년 전 그리스 궁수

전시홀 중앙에는 삼미신(Three Graces)을 배경으로 전시되어 있는 우람한 청동상이 있다.

청동상도 채색이 되었다는 것인가 잠시 의아해지나 디테일을 보면 청동 위에 색채를 표현한 기술에 놀라게 된다.

폴리데우케스(좌)와 아미코스(우)

1885년 로마의 퀴리날 언덕(Quirinal Hill)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로마의 로마 국립 박물관(Palazzo Massimo Alle Terme)에 보관되어 있는 박서(boxer)와 승리자의 모습을 한 청동상이다. 


기원전 400년경 그리스 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서 있는 승자는 제우스의 아들 폴리데우케스(Polydeuekes)이고 앉아 있는 박서는 포세이돈의 아들 아미코스(Amykos)다.

황금 양털을 찾아 떠났던 이아손과 아르고나트(Jason and the Argonaut) 원정대(https://brunch.co.kr/@cielbleu/246 참조)의 신화 속 여러 이야기 중에는 아미코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비트니아(Bithynia) 왕국의 왕인 아미코스는 자신의 힘을 믿고 모든 통행자들과 권투시합을 하여 상대를 죽이곤 했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이아손이 그를 혼내주기 위해 폴리데우케스와 시합을 하게 했고 결국 폴리데우케스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청동상은 두 사람(?)의 치열한 시합을 표현하기 위해 복싱 경기로 부은 눈가의 상처와 부어오른 귀, 찢어진 상처들을 아주 세세하게 표현해 놓고 있다. 청동으로 말이다.


다음은 고대 조각의 채색하면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바로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에 묘사되어 있는 페르시아와의 전투 장면 부조다. 


이 석관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시돈(Sidon)의 왕이 된 압달로니무스(Abdalonymus)의 석관이라는 설도 있는데 왕가의 혈통이었던 그는 한때 정원사 일을 하던 인물로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시돈의 왕좌에 오른 인물이다. 

맨 왼편 페르시아 군인의 방패에는 복원 과정에서 X-ray 등 특수 기법을 통해  페르시아 왕의 알현 장면이 그려져 있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스 초기 페인팅에 빨간색과 파란색이 추가되면서 색상의 다양화는 인물들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 등을 나타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설명이다.

알렉산더대왕의 석관(좌), 방패에 그려진 페르시아 왕의 알현 장면 확대(우)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완전히 채색된 스핑크스가 아닐까 싶다.

전시 포스터에도 주인공으로 장식되어 있는 이 작품. 

우리는 여러 작품 속에서 스핑크스의 모습을 많이 보아 왔다. 

친숙한 스핑크스의 모습은 아마도 아래 사진과 같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사자의 몸에 새의 가슴과 날개 그리고 사람의 머리로 표현된 상상의 동물 말이다.


기원전 500년경 기둥의 꼭대기 장식에 쓰인 스핑크스

그런데 완벽한 색들로 단장한 스핑크스의 모습은 글쎄다. 길 가다 만나면 깜짝 놀랄 만도 하겠다.

익숙함 때문인가? 눈의 장난인가? 감상의 평은 각자의 몫으로 남긴다.

기원전 500년경 그리스에서 만든 스핑크스는 몸은 황금색으로, 꼬리의 끝 부분은 '이집트 블루'로 표현하는 것이 대세였다고 한다.


채색되어 복원된 스핑크스(좌), 기존의 전시실에 원본과 같이 전시된 채색된 스핑크스(우)

전시실에는 작지만 눈에 확 띄는 두상이 있다.

로마의 세 번째 황제 칼리굴라(Caligula:AD12-AD41)의 두상이다.

채색된 칼리굴라(좌), 원본(우)
귓가의 섬세한 머리 표현을 보여주는 프로필


아그리파의 손자이기도 한 그는 즉위 초기엔 선정을 베풀었으나 왕위에 오른 7개월 후 열병을 앓고 난 후에는 포악한 정치를 일삼다 결국은 암살된 비운의 황제다. 

그가 만들어 놓은 로마인들의 목욕 문화를 보여주는 로마의 대형 목욕장은 우리에게는 관광코스로 유명하다.

기원후 40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의 두상은 섬세한 채색 기법과 목 뒤로 흐르는 머릿결의 표현이 높이 평가된다고 한다. 

스핑크스와 달리 칼리굴라의 두상은 채색된 모습이 더 눈에 들어온다.


두 명의 전사(warrior) 동상

다음 전시실에는 1972년 이탈리아의 리아체(Riace) 바닷가에서 발견된 두 명의 청동 워리어 상이 전시되어 있다. 


리아체 A(좌), 반대 방향에서 본 청동상(중앙), 리아체 B(우)


신장이 각기 197cm, 198cm로 거의 2m에 이르는 장신의 워리어들은 각기(구별을 위해 리아체 A, 리아체 B로 부른다) 정교한 머리와 수염의 표현 등이 기원전 500년경의 그리스 조각풍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눈동자는 돌(stone)로 표현했고 입술과 젖꼭지는 동으로, 이는 은으로 장식을 했다. 

앞에서 본 폴리데우케스와 아미코스의 동상과 유사하다.  

'리아체 A' 전사는 당시 전사들의 의복 형태에 따라 코린트 식 헬멧으로 복원했고 나이가 있어 보이는 '리아체 B' 전사는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에서 힌트를 얻어 여우 헬멧으로 재현했다는 설명이다.



채색 전의 대미(?)는 프라시클레이아 코레(Phrasikleia Kore)가 장식하고 있다.

프라시클레이아 코레 정면 모습

이 조각은 1972년 그리스의 아티카의 고대도시 미르히노스(Myrrhinous)에서 온전한 모습의 채색 조각으로 발굴되었다. 

이집트의 장례 의식인 연꽃(지하세계를 의미한다고 함)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여신 헤스티아(평생 처녀이며 가정의 질서를 담당하는 여신)를 연상시킨다는 설명이다. 

발굴 당시의 거의 완벽한 모습은 고대 채색 조각품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른손으로 살짝 치마를 들어 올린 모습이 정겹다.



작품이 많은 것은 아니나 따로 전시실을 만든 것이 아니라 메트 1층 그리스 로마 관에 당시 그리스 로마 조각들과 같이 전시되어 있어 비교하며 관람하도록 배치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40여 년을 고대 작품들의 채색 연구에 바친 연구진들과 발굴된 채색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여러 나라들의 협조로 이루어진 전시라는 설명이다.

기원전 200년경 작품으로 그리스 델로스에서 발굴된 여인상(좌), 기원전 470년경 작품으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굴된 토르소(우)

각종 최첨단 과학과 고증을 통해 희미해진 흔적에서 찾아낸 모습들은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본래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복원된 본래의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수 천 년 전의 채색이 거의 사라진 지금의 모습에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기도 하는 등 보는 이에 따라 감상의 기준은 다를 수 있다.


복원된 화사한 색채의 향연을 즐기다가 그것이 이미 수 천 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기나긴 시간의 갭은 깊은 감동으로 밀려온다.

더구나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복원된 작품들은 많은 이들의 노력 위에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기에 전시실을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다음날 다시 이 전시실에 서 있는 모습에 혼자 미소를 짓는다. 

색을 잃은 조각상들 사이에 복원된 조각상이 발길을 잡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