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꾸르베의 뮤즈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는 같은 주제로 그려진 19세기를 대표하는 두 거장의 작품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주제는 여인과 앵무새.
두 거장은 귀스타브 꾸르베(Gustave Courbet:1819-1877)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1832-1883)다.
뮤지엄 810호에는 꾸르베의 'Woman with a Parrot'이, 옆방 811호에는 마네의 'Young Lady :1866'가 전시되어 있다.
두 작품 모두 1866년 작품이다.
그러나 '여인과 앵무새'라는 주제를 빼고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두 작품이다.
전라의 여인이 머리를 마구 헝클어 트린채 희한한 자세로 누워 앵무새와 노는 모습을 그린 'Woman with a Parrot'은 사실주의를 지향하던 꾸르베가 1866년 살롱전에 제출한 그림이다.
신(god)만을 전라로 그릴 수 있다는 전통을 고집하던 살롱의 비평가들에게는 영 불편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자고로 예술작품이라 하면 이렇게 그려야 한다는 기준을 중시하던 비평가들에게 전형적인 기법이나 낭만주의 기법이 아니라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했던 꾸르베의 작품은 환영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꾸르베의 사실주의 기법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젊은 층 작가들에게는 오히려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마네는 같은 주제로 그린 그림으로 꾸르베의 작품에 화답(?)했고 세잔느는 꾸르베 작품을 사진에 담아 지갑에 넣고 다녔다는 뮤지엄의 설명이 따라온다.
꾸르베의 작품 속에 전라로 누워 있는 여인은 아일랜드 출신 모델 조안나 히퍼넌(Joanna Hiffernan:1843 – 1903)이다.
그녀는 미국 화가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1834-1903)와의 염문으로 더 유명한 모델로 우리가 기억하는 명작들 속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휘슬러란 이름이 익숙지 않다면 이 작품을 기억하면 된다.
원작명은 'Arrangement in Grey and Black No. 1'이나 '화가의 어머니'란 부제가 더 유명한 그림이다.
미국의 대공황(1929-1939) 시기에는 우표로도 제작되어 모범적인 어머니 상으로 매우 인기가 높았던 작품이다. 현재는 파리의 오르세 뮤지엄에 전시되어 있다.
아일랜드 대기근(1845-1852)을 피해 런던으로 이주했던 17세의 히퍼넌을 휘슬러는 1860년 런던의 한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났고, 곧 연인 관계가 되었다.
워싱턴의 내쇼날 갤러리에는 연인관계가 된 두 사람이 첫겨울을 파리에서 보내면서 그린 그녀의 대표 초상화
'Symphony in White, No. 1: The White Girl'가 전시되어 있다.
히퍼난의 트레이드 마크인 탐스러운 붉은 머리가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 휘슬러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그녀는 많은 예술가들을 매료시킬 정도로 아름답기도 했지만 지적 수준도 높았으며 직접 그림도 그렸던 것으로 전해지나 남겨진 작품은 없다.
휘슬러의 작품에 그려진 어머니의 모습에서 아들 휘슬러와 모델 히퍼난의 관계를 휘슬러 집안에서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관계를 인정받지 못한 히퍼난은 1864년 휘슬러의 두 번째 작품 'Symphony in White, 2번: The Little White Girl'에 다시 그려지는데 이 작품 속에서 히퍼난은 결혼반지를 끼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휘슬러와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암시한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이 그려졌을 즈음 휘슬러의 친구이자 동료 예술가인 귀스타브 꾸르베도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있는 고급 휴양지 트루빌(Trouville-sur-Mer)에서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작품이 바로 꾸르베가 그녀의 풍성한 빨간 머리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그린 'Jo, La Belle Irlandaise'다.
휘슬러가 자리를 비운 동안 히퍼난은 파리에서 꾸르베가 그린 'Le Sommeil'의 모델로 포즈를 취했는데 이때 그녀는 이미 꾸르베의 연인이었다는 평이다.
전라의 두 여인이 침대에서 서로 뒤 엉켜 잠들어 있는 모습의 이 작품은 파리의 쁘티 팔레(Petit Palais)에 전시되어 있다.
히퍼난과 같이 그려진 모델은 당시 최고의 고급 콜걸이었던 콘스탄스 퀴노(Constance Quéniaux:1832-1908)인데 오르세에 전시되어 있는 꾸르베의 '세상의 기원:L'Origine du monde'의 모델이 당시 히퍼난과 꾸르베의 관계 때문에 히퍼난이란 설과 콘스탄스 퀴노란 두 설이 있는데 퀴노일 것이라는 설이 더 우세하다고 한다. 굳이 확인이 필요할까 싶다.
휘슬러와 헤어지고 1880년 이후에는 히퍼난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1882년 꾸르베의 누이에게 니스에서 자신을 'Abbott 부인'이라 지칭하는 이가 있는데 아마도 그녀가 히퍼난인 것 같다는 내용의 편지가 전해졌다는 것이 전부다. 'Abbott'은 휘슬러의 미들네임이다.
그러다 1903년 휘슬러의 장례식에 베일로 얼굴을 가린 한 여인이 그의 관 옆에서 장시간 머물다 갔는데 누가 봐도 그녀는 히퍼난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휘슬러에 대한 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는 참석자들의 전언이 마지막 기록이다.
마네가 꾸르베의 작품에 화답하는 식으로 그린 그림이 바로 옆 방에 전시되고 있는 'Young Lady :1866'이다. 꾸르베의 그림 내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단아한 핑크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앵무새와 과일을 옆에 두고 조용히 그러나 당돌한 눈빛으로 관중을 응시하는 모습이다.
물론 이 그림도 살롱에서는 마네에게 혹평을 선사했다.
마네는 뭐가 중한지도 모르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서.
그러나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이 그림이 5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는 뮤지엄의 설명이다.
모델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푸른 잎은 후각을, 왼손에 들고 있는 안경은 시각과 촉각을, 앵무새는 청각을, 바닥의 오렌지는 미각을 의미하는 거라는데 그에 대한 평은 그림을 보는 우리의 몫이다.
언뜻 보았을 때 그녀의 실크 드레스는 단아하게 보이나 자세히 보면 몸에 살짝 붙어 신체 일부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인다.
전라보다 오히려 살짝 가린 것이 더 호기심을 자극한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이것도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이긴 하다.
마네의 작품 속의 여인은 참으로 당돌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눈빛이다.
그녀는 한때 마네의 단골 모델이었던 빅토린 뫼랑(Victorine Meurent:1844-1927)이다.
항상 그녀의 눈빛은 작품을 보고 나서도 꽤 오래 뇌리에 남곤 한다.
단아한 모습의 이 여인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에서 세간의 물의를 일으켰던 바로 그 나신의 주인공이다.
당돌한 눈빛을 빼고는 전혀 다른 느낌의 뫼랑이다.
마네의 문제작에는 늘 그녀가 그려져 있었는데 올랭피아의 모델도 역시 그녀다.
그녀가 마네의 모델로 선 마지막 작품은 1873년 'The Railway'라는 작품이다.
파리 생 나자르 역(Gare Saint-Lazare)의 난간에 앉아 역시 그녀의 독특한 시선을 우리에게 보내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작품은 1874년 살롱전에 전시되었다.
이 작품 이후로 화풍에 대한 의견차로 마네와 뫼랑은 서로 소원해지기 시작하여 더 이상 마네의 작품 속에 뫼랑의 모습은 없다.
뫼랑 자신도 여류 화가로 활동했는데 예술가였던 부모 밑에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화가로서의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마네와의 인연은 어느 날 기타를 들고 거리를 지나던 18세의 그녀를 보고 마네가 그의 작품 'The Street Singer'의 모델로 그린 게 인연이 되었다.
파리의 거리 캐스팅이었던 셈이다.
그 후 마네의 화풍보다는 고전적인 (academic style) 화풍을 좋아하던 그녀는 자연히 마네와 소원해지기 시작했고 그러더니 1876년 살롱전에서 뫼랑은 그녀의 최초의 살롱 출품작이 전시되는 영광을 갖게 된다.
문제는 그해 마네의 작품은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대단한 화가 마네의 대단한 모델 뫼랑이다.
1879년에는 마네의 작품과 같은 방에 전시되는 등 그녀는 1904년까지 총 6번의 살롱전에 출품했을 정도로 모델의 경지를 넘어 그녀 자신이 화가로서 당당한 위치를 굳혔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한다.
1880년대 그녀의 작품인 'Le Jour des Rameaux(palm sunday)'가 2004년 복원되어 콜롬브 시립 박물관(Municipal Museum of Art and History, Colombes)에 전시되어 있다.
레즈비언 친구를 두었던 그녀는 평생 결혼은 하지 않았다.
1906년 62세가 된 뫼랑은 파리 근교의 콜롬브(Colombes)로 이사한 뒤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예술가라고 불렀으며 83년의 인생을 그녀의 강렬한 눈빛처럼 살았다.
마네의 모델이었던 뫼랑은 당당한 예술가로 생을 마쳤으며 꾸르베의 모델이었던 히퍼난은 첫 연인이었던 휘슬러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묻고 은둔의 생을 살다 조용히 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생을 살았건 대가의 작품 속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앞으로도 그들의 드라마 같은 삶의 이야기는 많은 관람객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