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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Jan 01. 2023

46.  영국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왕조

뉴욕에서 만난 튜더 왕조 전시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에  즈음하여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는 영국의 가장 강력한 왕조였던 '튜더 왕조'에 관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메트로폴리탄 입구의 '튜더 전시회' 알림 전광판

'튜더 왕조'는 익숙지 않아도 '천일의 앤' 이야기는 많이 들었을 것이다. 

유부남이었던 헨리 8세와 사랑에 빠진 앤 볼린(Anne Boleyn:1500-1536)이 그 주인공이다. 

그녀와의 합법적인 결혼을 위해 교황청의 영향을 벗어나 본인이 직접 영국 교회의 수장이라고 선포해 버린 튜더 왕조의 두 번째 왕 '헨리 8세'의 이야기는 여러 번 영화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전시회에는 1485년부터 1603년까지 100여 년에 걸쳐 5명의 군주를 배출한 튜더 왕조의 다섯 명의 군주에 관한 초상화와 그들이 소장했던 역사적 유물들과 여러 예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장 입구

전시회가 열리는 2층 티쉬 갤러리(Tisch Galleries)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천장을 찌를 듯한 거대한 촛대와 두 명의 소년 장식이 우리를 반긴다. 

플로렌스 출신의 작가가 만든 작품으로 헨리 8세가 자신의 무덤 장식으로 쓰려고 했던 것이나 사용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400여 년 만에 한자리에 모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청동 촛대와 소년 상


반대편 벽면에는 튜더 왕조의 문장이 왜 흰 장미와 빨간 장미가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글이 쓰여 있다.

 

튜더 왕조는 '장미 전쟁(1455년~1487년)'의 승리로 영국의 왕권을 계승하게 되는데 이 전쟁은 흰 장미 문장을 가진 요크 가문과 빨간 장미 문장의 랭커스터 가문의 왕권 계승 싸움이었다.

혹독한 왕권 쟁탈 전쟁을 벌였던 두 가문의 유대를 나타내기 위해 흰색과 빨간색을 모두 품은 장미를 집안의 대표 문장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튜더 왕가의 문장


왕권을 놓고 하는 전쟁이다 보니 패자는 죽임을 당 할 수밖에 없어 당시 귀족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하는 처절한 전쟁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 귀족이 얼마 남지 않아 왕권을 강화하는 데는 오히려 유리한 환경이 되었다고.


이 전쟁에서 랭커스터 가문이 승리함으로 랭커스터의 방계 가문인 튜더 가문의 헨리 7세가 즉위하면서 튜더 왕조가 시작되었다.

'48세의 헨리 7세', 1505, 작자 미상(손에 든 장미가 눈에 띤다)

전쟁의 타이틀 치고는 안 어울릴 것 같은 '장미 전쟁'이란 타이틀은 두 가문의 상징이 흰 장미와 빨간 장미였기 때문으로 정식으로 이 전쟁을 '장미 전쟁'이라 부른 이는 17세기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소설가 월터 스콧(Walter Scott)이다. 

엘리자베스 1세 때 만들어진 튜더 왕조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판화(장미에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단의 문장이 가득 새겨져 있다)

헨리 7세(1457-1509)에서 시작된 튜더 왕조는 헨리 8세(1491-1547), 에드워드 6세(1537-1553), 매리 1세(1516-1558),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에 와서 후손이 없이 단절되게 된다. 

군주들의 이름만 봐도 격랑의 왕조였음이 느껴진다. 


헨리 8세야 다시 언급할 것도 없고 왕자가 귀했던 튜더 왕조에 어렵게 태어난 에드워드 6세(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의 아들이다)는 출생 시부터 병약했다고 한다. 

헨리 8세의 서거로 9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나 불행히도 16세에 세상을 떴다. 

그 뒤를 이복 누나인 매리 1세가 즉위하게 되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많은 개신교도 들을 박해 하고 처형하여 '피의 매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으로 불린다.

그녀의 뒤를 이어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라고 평생 독신을 선언한 엘리자베스 1세에 와서 후사 없이 왕조가 끝나게 된 것이다.


헨리 8세, 1537, 한스 홀바인,마드리드(좌)/에드워드 6세, 1547,Guillim Scrots,UK(우)
매리 1세,1554,Hans Eworth,London(좌)/엘리자베스 1세,1567,George Gower,개인 소장(우)

그러나 영국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크게 융성했던 왕조였다는 설명이다.

교황청에 반해 영국 국교회를 설립(물론 그 이유가 헨리 8세의 합법 결혼을 위한 것이기는 하였지만)하였으며 엘리자베스 1세에 와서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으로 전 세계에 군림할 수 있는 해군력을 키웠고 셰익스피어 같은 세계적 문호를 배출하는 등 화려한 시기였다. 

이런 르네상스 적인 분위기에 맞춰  이 시기를 '엘리자베탄(Elizabethan) 문화'라고 부를 정도다.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친 기념으로 1598년 만든 판화. 


튜더 왕조가 소장했던 타피스트리가 많이 눈에 띄는데 이는 헨리 7,8세가 모두 좋아했던 소장품이라 한다.

그 외에 화려한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엘리자베스 1세의 친필이 남아있는 서류도 볼 수 있다.

당시 패션을 주도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의상 따라잡기를 한 여인들의 초상화도 같이 전시되어 있어 근엄한 여왕의 자태와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헨리 7세가 트로이 전쟁 이야기에서 왕조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구입한 타피스트리(1488년 작품)(좌)/엘리자베스 1세의 친필 사인이 있는 신년 선물 목록(우)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당시 유행 패션을 볼 수 있는 엘리자베탄 작품들(1597)


그 외에 법률가이자 정치가였던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Thomas More:1478-1535)'의 초상화와 헨리 8세 당시 잉글랜드 교회 수장이었던 '존 피셔(John Fisher:1469-1535)'의 조각상도 눈에 띈다.


'존 피셔'는 헨리 8세를 영국 교회 수장으로 받아 들일것을 거부하고 왕의 부당한 결혼을 지적하다 1535년 6월 22일에 처형 됐는데 해롯 왕의 부당한 결혼을 지적하다 참수당한 세례자 요한의 참수일이 6월 24일인데 '존 피셔'의 처형이 세례자 요한을 떠올린다 하여 날짜가 중복되지 않도록 처형시켰다는 웃픈 뒷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당시 석학이었던 '토마스 모어'도 '존 피셔'와 같은 이유로 역시 같은 해 7월 6일 처형되었다. 

두 사람은 후에 모두 성인으로 추대 되었다.

이 왕조에서는 참수형이 너무 성행했던 거 같아 전시회를 둘러보는 동안 목 뒤가 서늘했다.

토마스 모어 경, 1527, 한스 홀바인, Frick NY(좌), 존 피셔, 1510,Pietro Torrigiano,Met NY(우)

헨리 8세는 여섯 번 결혼을 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형수(이 시기엔 가능했다고 한다)였던 아라곤의 캐서린(이혼), 두 번째 부인은 첫 번째 부인의 시녀였던 앤 볼린(천일의 앤의 주인공: 참수형), 세 번째 부인은 두 번째 부인의 시녀였으며 헨리 8세에게 아들 에드워드 6세를 안겨준 제인 시모어(산후 사망), 네 번째 부인은 외교상 선택했으나 인물이 없다 하여 왕 자신이 거절한 클레페의 앤(이혼), 다섯 번째 부인은 십 대의 발랄함에 반해 결혼했으나 심한 바람기로 참수시킨 캐서린 하워드(참수형), 여섯 번째는 자신의 말년을 맡길 여인으로 선택한 캐서린 파였다.

이 중 앤 볼린과 제인 시모어의 데생도 보인다. 모두 헨리 8세의 궁정 화가인 홀스 홀바인 작품이다.

앤 볼린, 1533, 한스 홀바인(좌), 제인 시모어, 1536, 한스 홀바인(우)/엘리자베스 2세 소장

그런가 하면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는 모두 6개가 전시되어 있는데 시대별로 다르게 그려진 여왕의 초상화를 감상하는 재미도 누릴 수 있었다. 

초창기의 심플한 초상화가 갈수록 화려한 모습의 의상과 귀금속들로 치장되는 여왕의 모습이 그녀의 권위를 실감케 한다.


1567(좌), 1575(중), 1583(우)
1592(좌), 1599(중), 1602(우)


튜더 왕조는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세상을 뜨면서 대가 끊긴다.

전시실의 마지막 그림은 엘리자베스 1세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를 왕족으로 기대를 모았던 웨일즈 공(Henry Frederick)의 용감한 사냥 장면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작품의 주인공인 웨일즈 공은 18세의 젊은 나이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 많은 이들을 실망케 했다고 한다.


Henry Frederick Prince of Wales, 1603, Robert Peake, Met NY




그 후 왕좌는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 1세가 물려받게 된다.

제임스 1세는 아이러니하게도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졌던 스코틀랜드의 비운의 여왕 매리 여왕(참조: https://brunch.co.kr/@cielbleu/126)의 아들이다. 

스코틀랜드의 매리 여왕은 헨리 8세 누나의 손녀로 엘리자베스 1세와는 5촌지간이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죽음, 1828, Paul Delaroche, Louvre(여왕에게 손을 내민 제임스 1세)

그런데 여기서 잠깐.

혹 9일의 여왕 제인 그레이(Jane Grey:1537-1554)를 기억하는지?

매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와는 5촌지간으로 재임 기간이 9일로 짧긴 하나 영국의 첫 번째 여왕으로 이름을 올렸던 여인이다. 

튜더 왕가의 에드워드 6세가 세상을 뜨고 매리 1세가 즉위하기 전 9일 동안 여러 정치 세력에 휘둘려 본의 아니게 여왕자리에 올랐다가 참수형에 처해진 비운의 여인이다. 그녀의 나이 17세였다.

그녀의 여왕 재임에 관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이번 전시에 그녀에 관한 기록은 눈에 띠지 않았다.


'제인 그레이의 처형',1833, Paul Delaroche, National Gallery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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