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이긴 하나 우리가 보는 하늘색과는 조금 다른 파란색이면서 자신만의 이름을 가진 특별한 파란색이 있다.
파란색이 파란색이지 뭐가 특별하다는 건지 갸우뚱할 수도 있다.
기회가 있어 조선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조선 기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최고 수준이란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배 선체의 외부 도색 단계에서 들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선주는 배의 외관을 빨간색으로 칠해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런데 빨간색으로 분류되는 색이 백여 가지가 넘더라고.
그 많은 빨간색 중 선주가 원하는 '그 빨간색'으로 도색하는데 솔직이 일반인의 눈으론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렵지만 바로 '그 빨간색'을 원하는 선주의 눈엔 '이 빨간색'과 '저 빨간색'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 문제였다고 한다.
미술에 관심 있는, 색감에 민감한 이들은 '당연하지.' 하면서 이 상황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색상표라던가 각 색상의 명도와 채도를 나타낸 표들을 보면 파란색도 이렇게 다양한 색들로 구분 지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파란색 색상표 일부(위키미디어)
'특별한 파란색이라니울트라마린 이야긴가? 파란색 하면 울트라마린이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파란색 안료 중 가장 비싼 안료로 유명한 울트라마린.
비싼 게 꼭 좋은 건 아니지만 울트라마린은 파란색 중 제일 비싼 안료이면서 색채가 갖는 매력 또한 제일로 꼽히는 파란색이다.
짐작했겠지만 이 안료가 비싼 이유는 재료의 희소성 때문이다.
금(Gold) 보다 비싼 안료로 준보석으로 분류되는 희귀한 광석 청금석(靑金石: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을 갈아 만드는 이 안료는 세월이 지나도 색이 변치 않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청금석 원석(위키미디어)
아프가니스탄이 주 산지로 이미 기원전 5000년부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이곳의 청금석을 가져다 쓰고 있었다.
워낙 귀한 광물이다 보니 고대 이집트에서는 오직 파라오 만이 청금석을 사용할 수 있었다.
14-15세기에 와서 청금석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유럽으로 이탈리아 상인들이 수입해 오면서 바다 건너 먼 곳에서 온 것이란 뜻의 라틴어 'ultramarimus(beyond the sea)'란 뜻이 그대로 안료의 이름 '울트라마린'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청금석으로 만든 울트라마린(좌), 합성 울트라마린(우)/위키미디어
당시 내로라하는 화가들, 지오토(Giotto di Bondone:1267-1337),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0-1455)나 마사쵸(Masaccio:1401-1428)들도 즐겨 이 안료를 사용했으나 워낙 귀하고 비싼 안료이다 보니 회화에서도 극히 일부, 중요 장면이나 인물에만 사용되곤 했다.
가장 좋은 예가 성모 마리아의 파란색 옷이다. 성모 마리아의 의상이 파란색으로 고정화되자 아예 이 파란색을 '마리안 블루(Marian Blue)'라고 부른다.
Lamentation,1304, Giotto di Bondone, Scrovegni Chapel, Padua
The Virgin with the Pomegranate, 1426, Fra Angelico, Prado Museum
워낙 비싼 재료이다 보니 작품을 의뢰받은 화가들은 울트라마린과 비슷한 파란색을 대신 사용하여 재료값을 줄였다는 웃지 못할 뒷이야기도 전해진다.
다행히 19세기 초(1824년), 프랑스의 화학자가 울트라마린 합성법을 찾아냈고 그 후로 합성 울트라마린을 'French Ultramarin'이라고 부른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울트라마린 색에 푹 빠진 화가가 자신만의 울트라마린 합성 제조법을 찾아내어 만들어 낸 고유 색상 'IKB(International Klein Blue)'다.
이 화가는 프랑스의 이브 클라인(Yves Klein:1928-1962)으로 파란색을 사랑했고 행위 예술을 시도한 진보적인 화가였다.
'IKB'.
우리나라 은행의 이니셜과 비슷한 듯 다른 이름이니 기억하기도 어렵지 않다.
간단히 '클라인 블루'로 불리는 이 파란색에는 그를 만든 화가의 이름이 붙어 있다.
'무슨 색에 고유 이름이 있나?'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아무나 자신이 좋아하는 색에다 '이건 누구의 색이다' 하고 이름을 붙일 순 없을 테니 말이다.
IKB 191, 1962, Yves Klein /위키미디어
이브 클라인은 자신이 원하는 파란색을 만들기 위해 여러 합성 안료를 배합하는 많은 실험을 했고, 1957년 원하는 색상을 만드는 데 성공한 그는 1960년 색상의 제조 과정을 특허로 등록했다.
당시 프랑스에는 색에 대한 소유권을 등록하는 법이 없어 색상의 제조법으로 특허를 냈다고 한다.
'클라인 블루'라 불리는 유일한 색이 탄생한 것이다.
이브 클라인은 부모님이 화가인 집안에 태어났으나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는 않은 화가였다.
1960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누보 레알리즘(Nouveau réalisme)' 운동의 시작을 알린 화가로 파란색을 좋아한 그는 울트라마린 색상의 모노크롬 작품을 즐겨 만들었고 진보적인 행위 예술을 추구했던 시대를 앞선 예술가였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불운의 화가이기도 하다.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란 사인을 두고 'IKB' 개발에 너무 심혈을 기울여 실험하느라 화학 재료들에서 얻어진 병일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어 시대를 앞서간 화가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Blue Monochrome', 1961, Yves Klein, Moma, NY
1957년 자신의 안료, 'IKB' 개발 이후 200여 편에 이르는 'IKB' 모노크롬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모노크롬 작품이야 말로 색의 무한한 존재감에 몰입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자유를 향한 열린 창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1960년 5월 파리(Galerie Internationale d'Art Contemporain) 에서는 전대미문의 행위 예술이 벌어졌다.
전라의 모델들이 IKB 물감을 몸에 바르고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인체측정: Anthropométries'이란 작품이 이브 클라인의 참여하에 만들어졌다.
이브 클라인은 살아있는 나신의 모델들을 붓으로 사용하는 기발한 기법으로 작품을 만들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찬반 여론이 들끓었다고 한다.
1960년 이브 클라인의 인체측정 작품 작업 동영상, 리움 미술관
리움 미술관에는 이브 클라인의 1960년 '인체측정' 제작과정을 담은 영상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실제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영상과 함께 이브 클라인의 1961년 작 '대격전(ANT103)'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작품도 '인체측정'과 같이 붓 대신 전라의 모델들이 만들어 낸 작품 중 수작으로 뽑히는 작품이다.
'대격전(ANT103)', 1961, Yves Klein, 리움 미술관
뉴욕의 모마 미술관에는 그의 인체측정(Anthropometry) 시리즈 중 하나인 'Princess Helena'와 그의 대표작 '블루 모노크롬'이 전시되어 있어 특별한 블루 작품들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다.
Anthropometry: Princess Helena, 1960, Yves Klein, Moma, NY
Blue Monochrome, 1961, Yves Klein, Moma, NY
수 천 년 전 인류 최초의 인공 안료로 인정받는 '이집션블루(Egyptian blue)'를 시작으로 중세의 '마리안블루'를 거쳐 18세기 프로이센의 학자들이 개발한 만들기 쉽고 값도 저렴한 최초의 합성 안료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eu)', 거기다 '인디고 블루'와 19세기 와서 '코발트블루'가 등장하더니 영국의 왕 조지 3세는 자신의 왕비에게 선물할 옷의 색으로 역시 파란색을 선정하면서 '로열 블루'라는 또 하나의 파란색을 탄생시키면서 그 다양성의 한계를 넓히고 있다.
칸딘스키는 파란색을 '짙어질수록 무한성이 강해지고 초자연적인 느낌을 주는 색.'이라고 평했다.
그런가 하면,
절제된 색채로 자신을 과도하게 나타내지 않으면서 고귀함과 신성함을 전달하는 색.
이성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을 모두 갖춘 색.
순수하면서도 시선을 끌어들이는 강한 흡입력을 가진 색.
모든 것에서 해방된 색.
깊고 아름다우면서 차가운 색.
농도의 진함이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매력의 색.
이렇듯 파란색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양한 평가를 받는 파란색이다.
같은 듯 조금씩 다른 많은 파란색을 알고 나니 앞서 언급한 선주의 '이 빨간색 주문'이 급 동감이 된다.
빨간색이라고 다 같은 빨간색이 아니었으니.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게 파란 하늘이 머리 위에 펼쳐지는 날이면 고가의 울트라마린에 자신의 이름을 달아버린 이브 클라인의 멋진 블루가 생각나곤 한다.
1960년 작 'Grande Anthropophagie bleue/Hommage a Tennessee Williams' :ANT76 앞에선 이브 클라인(위키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