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웨이주연 영화 원더랜드를 보고
탕웨이 주연의 [원더랜드]라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 한켠이 묵직했다. 죽은 이를 AI로 만나는 곳. 처음 들었을 때는 섬뜩했다.
원더랜드라는 곳. 죽은 이들을 AI로 복원해 만나는 곳이다. 어린 딸에게 자신의 죽음을 숨기려 AI가 되기로 한 엄마는 사막을 누비는 고고학자가 되었다.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랑이 있었던 걸까. 나는 그저 그것이 부러웠다.
상실은 내게 낯선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일상이었다. 그런데 죽음은 달랐다. 이제는 원망조차 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상실보다 더 큰 절망이었다.
원더랜드의 AI는 너무나 생생했다. 죽은 이의 목소리를 듣고, 표정을 보고, 심지어 대화까지 나눌 수 있다니. 하지만 그렇게라도 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닐까. 보고 싶다는 게 이런 거였던가.
딸은 엄마가 실재하다고 믿고, 엄마잃은 손주를 키우는 할머니(극중 탕웨이의 엄마)는 딸의 죽음을 알고 있다.
할머니는 가짜 딸의 영상통화에서 슬프기만하다. 가짜임을 알고 받는 전화는 딸의 죽음을 확인시키는 일일 뿐이다.
카프카가 공원에서 울던 아이에게 잃어버린 인형의 편지를 써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별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상실을 인정하고,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시간. 그래야 다시 누군가를 온전히 만날 수 있다. 죽은 이를 AI로 되살리는 대신, 살아있는 이들과 더 깊이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디지털 영원 속에서 진짜 사랑을 잃어가지 않을까.
슬픔을 지우는 것보다 슬픔을 껴안고 걸어가는 법을 배우는 것.
그래야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의 슬픔을 알아볼 수 있다.
사랑하는 이의 빈자리는 똑같은 모습으로 채워질 수 없다. 때로는 전혀 다른 모양의 사랑으로, 예상치 못한 위로로 찾아온다.
원더랜드에서 간과한게 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건 불완전한 현실을 견디는 힘이라는 것. 떠난 이의 빈자리를 그대로 안고 가는 용기. 그 빈자리가 있었기에 나는 더 단단해졌고, 다른 이의 아픔도 알아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