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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Feb 03. 2022

용기내요, 어른이니까.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두 번 관람하고.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

죽을 수 있을 때까지.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종교일 것이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는 하나의 분명한 종교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삼촌>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소냐'의 독백 내용 때문에 이 작품을 비극이라 부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체호프 자신도 희극이라 했다.) 그리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2021)>에서 소냐의 독백을 한국 수어로 탁월하게 표현해낸 것을 보면서 감독도 체호프의 생각에 강하게 동의한다고 생각했다. 두 작품(어쩌면 한 작품)은 무위의 삶을 살고 있는 존재들에 대해 그렇게 간단히 슬픔,이라고 단정짓지 않았다.



어른이라면, 제대로 판단하고 상처를 받아야만 한다.

그 상처에게 고통의 이름을 달아주고, 충분히 아파해야만 한다.

회한이 남지 않으려면 충분히 사랑했어야 하고, 충분히 아파해야만 한다.

면피하려 했던 시간은 언젠가 더 큰 파도로 삽시간에 내 삶을 삼킬 수 있다는 것을,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이었던 가후쿠는 아내인 오토가 죽고서야 알았던 것 같다.

이미 오토를 잃었다는 사실을 피하고 묻어두려 했던 시간의 대가만큼 그가 치러야 했던 고통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져 있었다. 사랑을 지키는 것에만 골몰하다보니 역설적으로 사랑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소유하려 할수록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지키려할 수록 지킬 수 없게 되는 역설.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 만큼이나 그를 괴롭혔던 것은 지키려했기에 모른 척했던 아내의 다른 모습을 인정할 수가 없었고, 그것은 관계를 왜곡시켰다. 그는 단순히 아내를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내를 자신의 두 손으로 죽였다는 죄책감에 휩싸인채 남은 생을 살아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삼촌>에서 바냐가 남은 삶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울부짖었듯이 말이다.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 미사키 역시도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내가 너의 아버지라면, 너의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했겠지만. 그건 아닌것 같아. 그건 네가 잘못한 것 맞는것 같아." 라고 그녀에게 날카로운 말을 전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로 위로하는 것은 어른이 아이에게 하는 위로이다. 체호프의 <바냐 삼촌>의 주인공 바냐와 동갑인 마흔 일곱의 가후쿠는 어리지만 강단있는 스물 셋의 미사키에게 용기 내기를 종용한다. 용기 내어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상처 위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달라질 것은 없고, 누군가의 달콤한 말로 지나간 일이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각인시킨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함께 있는 '사람'으로서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그래서 폭삭 무너져 눈에 파묻힌 미사키의 집 앞에서 포옹을 나눈다. 각자가 겪은 과거의 사건 이후, 처음으로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위로했다. 그 위로는 각자가 서로에게 선물하는 이국행 비행기 티켓 같은 것이었다.



과거에는 꿈이 있고, 멋진 것들을 생각했더라도 실현되지 못하는 일이 더 많다.

우리는 대부분 <드라이브 마이 카>영화의 주인공처럼 혹은 체호프 희곡의 <바냐 삼촌>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어른이 되었다고 모두 이룰 수 있는 것도, 이루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모든 결과들을 따뜻하게 품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가 된 건 아닐까. 이루어서 어른이 되었다기보다, 모두 품을 수 있어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니,

바래지고 짓이겨진 시간들을 회한으로 뒤돌아보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

지난 시간에 이름을 붙이고 간.단.히. 이별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낙원은 낙원이라 인식하는 순간 사라지고

고통을 고통이라 인식하는 순간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버리므로 지나가는 것들을 피하지 않고 목도하여 제 때 인사를 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별해야 할 것들에게는 이별을 고하고 상처에는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별과 고통을 받아들이는 일에 용기를 내는 사람이야말로 어른인 것만 같다.

 

(영화에서)가후쿠가 토해낸 (희곡의)바냐의 대사처럼 회한의 순간을 맞이하지 않은 인간이 어디있을까.

"내가 정상적으로 살았더라면 쇼펜하우어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인물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 "
-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체호프 희곡선>, 을류문화사, p.178


그렇지만 벗어나고 일어나는 힘도 우리에겐 허락되어 있다.

"바냐 삼촌,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길고 긴 낮과 밤들을 살아갈 거예요.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이 시련을 꾹 참고 견뎌낼 거예요. 우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도, 그리고 늙어서도 안식을 잊은 채 일할 거예요. 그러다 언젠가 우리의 때가 닥치면 불평 없이 죽어 갈 거예요. 그리고 우리 무덤 위에서 이렇게 말하겠지요. 우리는 고통을 겪었고, 눈물을 흘렸고, 괴로워 했노라고... (중략)... 비록 자신의 생애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했지만, 기다려요, 바냐 삼촌, 조금만 기다려요....... 우린 쉴 거예요. 우리는 쉴 거예요. 우리는 쉴 거예요!"
-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체호프 희곡선>, 을류문화사, p.199-200


소냐의 마지막 독백을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이 희극의 삶이 언젠간 끝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죽을 수 있을 때까지, 끝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여기에서 용기있게 서 있어야 한다.

단단하고,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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