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아침마다 9호선을 타고 회사로 간다. 순대 속 당면보다 더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을 볼 때면 최영미 시인의 시 '지하철에서1'을 떠올린다. 밥벌레가 되어 순대에 탑승하는 관성적인 삶을 10년 이상 계속하고 있다. 땅 속을 유동하는 순대에 몸을 맡기고, 회사와 집을 진자(振子)처럼 오가는 생활이다. 단순하고도 반복되는 이 행동. 삽질이다.
삽질과 관련된 소설을 읽었다. 일본 작가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다.
31살 교사 니키 준페이는 8월 어느 날, 휴가를 얻어 어느 마을의 모래언덕으로 떠난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모래 곤충을 새로 발견하겠다는 거창한 목적과 함께. 하지만 계획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모래언덕 마을의 노인이 알려준 숙소는 모래 구덩이 안의 집이다. 집에는 30대 과부가 혼자 살고 있다. 이 여자의 행동이 묘하다. 낮이고 밤이고 집 주변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모래를 퍼 나른다. 여자의 의미없는 행동에 준페이는 질겁한다. 하지만 준페이 역시 같은 처지가 된다. 모래구덩이로 내려올 때 사용했던 줄사다리는 보이지 않고, 의뭉스러운 마을 노인은 자취를 감췄다. 이제는 준페이도 여자와 함께 모래를 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쏟아져내리는 모래가 집을 삼켜버린다.
이 모래 구덩이를 버리고 빠져 나가면 되지 않는가? 준페이의 당연한 질문에 '모래의 여자'는 태연히 대꾸한다.
"밖으로 나가 봐야, 딱히 할 일도 없고."
삽질만 하면 마을 사람들이 술과 담배, 음식을 내려보내준다. 그럼에도 준페이는 무의미하고 목적을 상실한 삽질을 견디지 못한다. 준페이는 혼자라도 탈출을 해보려 줄사다리를 만들어 모래 구덩이를 빠져나온다. 그러나 이내 마을 사람들의 추격을 받는다.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는 모래 삽질, 그게 아니라면 쫓기는 도망자의 삶. 알고보니 준페이에게 선택지는 둘 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되돌아온 준페이는 체념을 하고 '모래의 여자'와 살을 맞대고 살아간다. '모래의 여자'는 곧 임신을 하게 되고 마을 사람들은 여자를 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줄사다리를 내려준다. 준페이는 여자가 떠난 뒤에도 모래구덩이로 드리워진 사다리를 보며 잠시 고민한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이 지긋지긋한 구덩이를 벗어날 것인가? 뜻밖에 준페이는 탈출을 포기한다.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며 스스로를 위무한 채.
의미없이 반복되는 노동, 그게 아니라면 생계라는 야수에 쫓기는 삶. 장삼이사, 갑남을녀, 필부필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바로 그 평범한 서사가 모래 구덩이에서 '쫀쫀한 긴장감'과 함께 펼쳐진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준페이가 탈출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준페이와 '모래의 여자'가 끝내 탈출에 실패한 탓에 이 소설의 뒷맛은 헛헛하다.
순대에서 탈주하려던 밥벌레의 분투기는 끝내 좌절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