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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실생활자 Sep 15. 2015

#04 초록유리병

ⓒkimeungyoung


어릴 적 우리 집 책장에는 앙증맞은 도자기 인형이 빼곡했다. 대충 야드로 도자기 인형류를 상상하시면 될까. 하지만 우리 집 도자기 인형들은 그런 고가의 것들은 아니었고, 엄마가 시장이나 소품 가게에서 사온 평범한 것들이었다.


푸른색 장미가 앙증맞게 달렸던 레이스 문양 들어간 화병 모양 장식품,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와 아로아처럼 나막신에 튤립 모양의 고깔 모자를 쓴 인형, 드레스 입은 귀부인 인형, 바구니에 눕혀 잠자는 아기 인형... 갖가지 도자기 장식품 인형들이 참 많이도 늘어서 있었다.


아가씨 때는 취미가 손수건 수집이었고, 봄이 되면 화훼단지부터 가셔서 갖가지 꽃화분을 들여와 마당과 옥상을 채우시고, 별별 모양의 도자기 인형을 모으는 것에 참 열심이셨던 소녀 취향이 분명한 엄마. 엄마는 무뚝뚝한 딸 때문에 갑갑하셨겠지만, 소녀 취향과는 거리가 먼 어린 딸은 책 앞에 쪼물쪼물 늘어서 손길을 방해하는 그 도자기 인형들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책 한 권 꺼내려고 해도 그 도자기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조심조심 밀쳐야 했고, 대청소라도 하는 날엔 책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절로 내 구역이 되어 책장 먼지 닦기는 으레 내 몫이었다. 그 빼곡한 인형들을 먼저 책장에서 치우고 걸레질을 해야 하니 그날은 인형들에 대한 짜증이 백배는 치솟았다. 물론 책장 먼지를 턴 뒤엔 그것들도 하나하나 먼지를 닦고 줄지어 세우며 또 한번 울화통이 터졌고. 책장이라는 본래의 용도를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왜 그것들을 비효율적으로 늘어놓는지 어린 맘에 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세월은 흘러 이제 연세가 많으신 엄마는 다리가 아파 봄에도 화훼단지에 가실 엄두를 못 내시고, 얼마 전엔 늦도록 시집 안 가고 있는 골칫덩이 딸에게 참으로 예스러운 손수건들을 가지라며 넘기셨다. 그 많던 도자기 인형들은 세월을 지나며 어떻게 사라졌는지 무심한 이 딸은 기억도 못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떠올랐다. 은은한 푸른색이 예뻤던 몇몇 도자기 인형들이. 그 반들반들 반짝이던 인형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잠시 그 도자기 인형들이 그리웠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인형들의 세세한 장식을 기억하는 건 나다. 하나하나 먼지를 닦아주며 눈에 박혔으니. 아, 물론 그 그리움은 아주 잠시였다. 작고 거추장스러운 장식 때문에 닦기는 또 얼마나 불편했던가.    


그런저런 이유로 내가 아기자기한 무언가를 찾는 일은 절대 없을 줄 알았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후배 결혼 선물을 사러 간 인테리어 소품 가게에서 우연히 본 조그만 초록색 유리병을 결국 사고야 말았다니. 책상 위에 놔두면 한동안 기분이 상쾌할 것 같아서, 라고 쓸데없는 변명을 하며. 그렇게 데려온 이 녀석은 그동안 몇 군데 직장을 옮기면서도 계속 내 책상을 지켰고,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여전히 바라보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초록빛을 빛내며.  


엄마도 그 반짝반짝하던 앙증맞은 도자기 인형들을 보며 고단한 생활에 지친 마음을 쉬셨을까. 삶의 우울함을  위로받으셨을까. 마음은 때로 생각지도 못한 작은 것에 가벼워지고 환해지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제서야 조그만 도자기 인형들을 모으던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본다.   






초여름쯤 됐으려나?

조금 짙어진 초록의 풀밭 위에 낡은 의자가 놓여 있다. 그 오래된 의자 위에 어울리지 않게 놓인 투명한 초록빛 유리 화병, 그리고 그 화병에 꽂힌 소박한 꽃송이. 낡고 부서진 의자는 저 화병이 놓여있기엔 너무 위태롭다. 화병은 가뜩이나 금방이라도 파삭- 부서질 듯 깨지기 쉬워 보인다.  

행여 떨어져 깨질까 위험해 보이는 화병은 바라보는 이를 괜히 긴장시킨다. 그럼에도 그 긴장감을 잊고 풍경을 따듯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화병에 꽂힌 소박한 꽃 때문이 아닐까. 은은한 노란색과 분홍색 꽃이 느른한 햇살 속에서 달콤하다. 나른한 초여름, 느긋이 눈감고 즐기는 하늘하늘한 달콤함.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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