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달빛 Nov 11. 2016

<죽여주는 여자>, 참 잔인하시군요

영화

스포일러 주의! 영화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가을,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봤다. 상영 후 배우 윤여정이 관객과 대화를 하는 시사회였다. 사회는 <씨네 21> 김혜리 기자가 봤다.

영화는 파고다 공원 일대를 돌아다니며 성매매 하는 일명 '박카스 할머니' 소영의 일상을 담았다.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노인의 성, 죽음, 조력자살, 코피노, 트랜스젠더, 장애인 등 우리 사회의 '뒷면'을 쓸쓸하게 보여준다. 영화 제목인 '죽여주는 여자'라는 표현은 중의적이다. 소영은 노인들의 초라한 성욕을 '죽여주게' 해결해주기도 하지만 사는 게 창피하고, 어쩌다 이렇게 늙어버렸는지 몰라 죽고 싶은 노인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죽여주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마음을 당겼다. 최초의 생각은 “늙은 남성들의 성욕은 박카스 할머니를 통해서라도 해결되는데 늙은 여성들의 성욕은 어떻게 해결하는가?”였다. 꼭 ‘늙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연령대에서 ‘성’의 주체는 남성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그 남성의 성욕을 해결해주기 위한 대상으로 존재할 때가 많다.

영화에 등장하는 탑골공원은 성욕을 해결하기 위한 남성 노인들과 4만 원을 받고 그 욕구를 채워주는 ‘박카스 할머니’들이 만나는 공간이다. 유행이 지난 옷과 액세서리로 한껏 멋을 부린 중년(혹은 그 이상) 여성이 “박카스 한 병 마실래요? 잘해드릴게요”라는 말을 건네며 거래를 트고, 계약이 성사되면 종로 3가 허름한 뒷골목의 여관에서 색스를 한다(소영은 “저랑 연애하실래요? 잘해드릴게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맺어진 찰나의 관계는 허름한 나체로 당당하게 다리를 벌린채 요구하는 고용인과 “돈이 아깝지 않도록” 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피고용인으로 존재한다. 고용인이 4만 원을 내면 1만 원은 여관방 대실비 선급을 내고, 나머지는 피고용인의 일당이 된다. 그렇게 받은 일당은 다시 하루를 견디는 최소 생활비로 쓰거나 ‘일수’를 갚는 데 사용한다. 소영은 그 업계에서 제법 소문난 '죽여주는' 여성이다.


“왜 이 일을 하세요?”라는 다큐멘터리 감독(남성)의 물음에 소영은 “죽을 수 없으니 살아야 하니까. 여자 혼자 늙으면 할 게 없어. 폐지 줍는 노인은 되기 싫더라고.” 담담하게 대답한다. 그녀에게 섹스란 살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해야 하는 ‘업무’인 셈이다. ‘업무’가 아니라면 그는 굳이 섹스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반면 남성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이 사회적 존재라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걸 할 수 있나’ 여부로 판단한다. “나 이제 그것도 못해”라는 말은 그들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그래서 돈을 주고 여자를 산다. 남성은 늙어서도 성욕을 누군가 대신 처리해줘야 ‘인간’ 일 수 있는 존재다. 다소 건조하게 평가하자면 같은 섹스지만 남성 노인에게는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여성 노인에게는 경제활동인 셈이다. 그런 서로의 필요가 만나 시장이 형성된다.

그렇게 성욕을 위탁한 남성들이 이제는 ‘죽음’마저 소영 위탁한다. 자신(혹은 친구)을 죽여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래서 소영은 풍을 맞아 요양병원 침대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옛 고객’은 농약으로, 치매에 걸린 독거노인은 산 정상에서 밀어서, 배우자를 떠나보낸 상실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오빠’라 부르던 그가 수면제를 털어놓는 호텔에서 외롭게 죽지 않도록 최후의 동반자로 ‘죽여주는’ 여성이 된다. 기본 생리 현상도 처리하지 못한 채 누워만 있어서 ‘혼자서는 죽을 수도 없는’ 첫 번째 고객의 경우야 대체로 납득이 되지만 두 번째, 세 번째는 굳이 소영에게 부탁을 해야 했을까? 이를 두고 김혜리 기자는 “섹스도, 죽음도 여성에게 맡겨버리는 남자들”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내 생각이 딱 그 생각이다. 남성들은 늙은것들이나, 젊은것들이나 성욕도, 죽음도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존재들인 셈이다. 반면 소영은 그런 삶을 그저 담담하게 살아낸다. 죽을 수 없으니까, 살아야 하니까.

영화의 또 다른 포인트는 ‘양공주’와 ‘코피노’의 만남이다. 소영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식모, 공순이 등 안 해본 일이 없고 미군 부대 '양공주'로 지내며 혼혈아를 낳아 입양 보낸 이력이 있다. 죄의식이 항상 그녀를 지그시 누른다. 그런 그녀가 성병에 걸려 찾아간 산부인과에서 우연히 ‘코피노’ 아이를 만나 한시적으로 맡게 된다. 그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싸지르고’ 외면한 남성(소영이 찾아간 산부인과 의사)을 가위로 찔러 구치소에 수감되었기 때문이다. “오다 주웠어”라고 한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아이를 소개하며 “얘를 왜 데려왔는지 나도 모르겠어”라고 후회하지만 소영은 아이를 살뜰하게 챙긴다. 어쩌면 그 시간이 그녀에게 입양 보낸 아이를 향해 ‘속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소영의 삶을 두고 배우 윤여정은 “미숙(소영의 옛 이름이다)은 사실 젊었을 때 죽었다”라고 해석했다. 나는 그 해석이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영화가 진행되는(2015년 가을 무렵부터 2016년 봄까지) 소영은 그래 보였다. 영화는 그렇게 버석버석하게 이미 죽어버린 소영을 한순간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서 섹스하지만 남성은 고용인으로서 당당하고, 소영은 ‘몸 파는 년’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죽음마저도 위탁한 그들은 뒤늦게라도 ‘존엄사’ 했을지언정 소영은 구질구질하게 살아남아 ‘연쇄살인범’이 된다. 그래서 나는 호텔 방에서 수면제로 노인을 죽인 죄로 체포된 차 안에서 담배 한 대를 빌려 피며 “거긴 세끼 밥이 나오니 차라리 잘 되었다.” 한숨처럼 뱉을 때, 그녀가 비로소 삶에서 풀려났다고 생각했다. 죽어야 풀려나는 삶도 있을테니까.


영화가 딱 거기서 끝났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그나마 소영의 존엄을 지켜주었을 테니까. 그러나 끝내 소영이 교도소에서 죽어 재가 되는 것까지 보여준다. 평생 혼자 외로웠을 그녀가, 그러면서도 ‘몸 파는 양공주’로 손가락질받았던 것도 모자라, 연쇄살인범으로 생을 마감한 그녀가 ‘인간’으로 대접받을 기회가 얼마나 있었겠나. 그래서 죽어 화장된 그녀의 육신은 ‘신원미상-양미숙’이다. 노년의 그녀와 함께 살았던 트렌스젠더, 장애인 (비혈연) 가족들도 결국 '곁'이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지우고 싶어 했던 과거의 이름을 고스란히, 외롭게 박제시켰다. 영화는, 사회는, 남성들은 정말 끝까지 소영에게 잔인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죽기 전 남성 노인들은 "사는 게 부끄럽다"거나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늙었을까?"라는 따위의 말을 반복한다. 이건 분명 나이 들며 느끼게 되는 무력과 수치의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소영에게는 그런 말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저 적응하고 살아낼 뿐이다. 김혜리 기자는 이런 소영을 '순응하는'이라 여겼고, 어떤 관객은 '저항적'이라 여겼다. 둘 다 맞는 말이긴 한데 나는 김혜리 기자의 해석에 더 동의했다. 대개 여성이나 약자는 순응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기 때문이다. 약자에게는 자의식과 언어조차 사치다. 이렇게 정리를 해보니 이 영화가 ‘남성’의 시선에 소영을 감금시켰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어 유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