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 이야기 : 마리아나 코스쿨
마리아나 코스쿨은 스웨덴의 귀족 가문 출신 여성이었습니다. 코스쿨 가문은 매우 부자 가문은 아니었지만 스웨덴의 핵심 귀족가문 특히 브라헤 가문과 통혼을 하면서 역시 친척관계를 이루는 가문중 하나였었죠.
당대 많은 스웨덴 귀족 여성들처럼 마리아나 역시 매우 교육을 잘 받았다고 합니다만, 그녀의 집안은 그렇게 부유하지 않았었습니다. 이때문에 마리아나의 아버지는 마리아나의 여동생을 사랑하는 남자와는 그냥 만나고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라고 압력을 넣기도 했었습니다.
교육을 잘받았었으며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마리아나는 당시 스웨덴의 국왕이었던 칼 13세의 왕비인 카를로타 왕비의 시녀가 됩니다. 카를로타 왕비는 마리아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했었다고 합니다만 어쨌든 마리아나는 국왕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1809년 국왕 칼 13세의 정부가 됩니다.
1810년 스웨덴에는 새로운 왕위계승자가 옵니다. 바로 프랑스의 장군이었던 장 바티스트베르나토트였습니다. 그는 스웨덴의 왕위계승자로 선출되었으며 이름을 바꾸어서 스웨덴의 왕태자 칼 요한이 되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아내와 아들과 함께 왔었지만, 그의 아내인 데지레 클라리는 스웨덴 궁정을 적응하지 못했고 곧 떠나버렸습니다.
아내가 떠난후, 칼 요한은 궁정의 여성과 연애질을 하는데 바로 국왕의 정부였던 마리아나 코스쿨이었습니다.물론 처음에는 비밀이었는데 칼 13세의 아내로 궁정 소문에 빠삭하다고 자부했었던 카를로타 왕비 조차도 마리아나 코스쿨이 왕태자의 정부가 된 사실에 대해서 늦게 알았다고 합니다.
국왕과 국왕을 대신해서 실질적으로 국가를 통치했던 왕태자의 정부였던 마리아나 코스쿨은 당연히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정치적 문제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국왕 곁에서 국왕에게 정치적 문제를 환기 시키는 일은 물론, 왕태자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마리아나 코스쿨의 친척들 역시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특히 왕태자인 칼 요한의 최측근이자 스웨덴내 최고의 지지자 중 한명이었던 닐스 마그누스 브라헤 백작이 마리아나 코스쿨의 친척이었으며 또다른 인물역시 마리아나와 친척관계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마리아나가 궁정에서 엄청나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녀의 친정식구들에게 이익을 주도록 했었고 모두가 쑥덕이게 만들기도 했었습니다.
특히 1818년 칼 13세가 죽고 칼 14세 요한이 즉위한뒤에도 그의 아내인 데지레 클라리가 스웨덴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818년에 칼 13세의 왕비였던 카를로타 왕비마저 죽었으며, 칼 14세 요한의 아들인 오스카르는 미혼이었기에 궁정에 안주인이 될 여성이 없었습니다. 그에 국왕의 정부였던 마리아나 코스쿨이 왕궁에 살면서 안주인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1823년 왕태자였던 오스카르가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과 결혼하면서, 조제핀은 시어머니인 데지레 클라리를 모시고 스웨덴으로 돌아왔습니다. 왕비와 왕태자비가 궁정으로 돌아오면서 자연스럽게 마리아나 코스쿨의 역할은 끝나게 됩니다. 왕비가 돌아온후 마리아나 코스쿨은 왕비의 시녀장 지위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나 코스쿨의 국왕의 정부 라는 지위는 끝났으며 평범한 시녀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데지레 클라리는 시녀들이 자신 곁에 있는 것을 싫어했었기에 마리아나는 궁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평온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더하기
칼 14세 요한은 아내가 떠난뒤 정부를 얻었으며 돌아온뒤 바로 정부와 헤어졌기에 아마도 그가 공식 정부를 들이는 왕가의 전통을 따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데지레 클라리에 대놓고 적대적이었던 카를로타 왕비는 칼 14세 요한이 마리아나 코스쿨을 좋아해서 아내가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쓰기도 했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