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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Dec 21. 2023

예술가의 길

플라멩코를 보며

플라멩코 Flamenco, 스페인의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 (플라밍고, 플라멩고, 플라맹구 아님 주의!)


세비야, 말라가, 코르도바, 그라나다, 헤레스 등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는 각 도시마다 플라멩코 공연장을 갖추고 있다.


많은 경우 스펙터클한 무대를 선보이는 세비야 공연장으로 간다. 물론 다른 공연장들도 저마다의 개성이 강하고 흡입력 있는 무대이기에 보는 즐거움이 있다.


스페인의 무형 문화유산인 플라멩코를 저마다 정의 내릴 단어는 많을 것이다.


보기 전까지는 그저 발이나 요란스레 구르고 창 읊듯 구슬프게 부르는 노래가 다인 줄 알았다가, 직관 후엔 말로 다 못할 벅찬 감동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플라멩코를 보지 않고 스페인에 왔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플라멩코의 가수, 무용수, 연주자 모두 다 이 잘 맞아야 하지만, 아무래도 제일 눈을 사로잡는 건 무용수, 바일라오르Bailaor(남성)와 바일라오라 Bailaora(여성)이다.


내게 플라멩코는 두 단어다, 절도와 폭발.

절도 있는 동작에 숨을 죽이고

폭발적인 연기에 탄성이 터진다.




오랜만에 그라나다 공연장을 찾아갔다.

그라나다 공연장은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한 팔 벌렸을 때 정도로 굉장히 가깝다. 아티스트들의 머리끝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은 물론 들숨 날숨의 호흡에 뜨거운 콧김까지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번 공연에 단체는 우리 팀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단독공연이었다. 대체 어떤 팀이 무대에 오를까. 


무용수 둘, 남성 무용수 하나. 여성 둘은 양 머리끝을 동그랗게 말아 붙여 디테일을 살렸고, 남성은 훤칠한 키에 웃는 상이라 꽤 어려 보였다.


가수인 깐따오르cantaor의 늘어지는 목소리는 기타리스트 또까오르 tocaor의 현란한 연주 테크닉과 묘한 대조를 이루어 분위기를 무르익게 한다.


여성들은 몇 번씩 옷을 바꿔 입어가며 노래와 조화를 이룬다. 주름치마의 화려함은 가녀리지만 절도 있는 손끝 마디를 보다 돋보이게 한다. 기氣를 발산하는 느낌이랄까.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팀에서 재일 어려 보이던 남성 무용수는 힘찬 발구름으로 시작하더니 그루브를 타듯 긴 머리채를 휘두른다. 동시에 절도가 넘치다 못해 칼로 베듯 끊고 맺음이 굽 소리와 딱딱 맞아떨어진다.


관객은 무용수의 박 터지는 구두굽에 턱을 떨어뜨린다. 그러다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기가 미안한지 박수를 열렬히 쳐댄다. 그러나 민망하게도 들의 박자에 어긋나는 박수는 한창 열연 중인 무용수에게 호응이 아닌 정신을 흩뜨려놓는 훼방거리가 되고 만다.


하여 검지를 있는 힘껏 흔들어댄다. 바디랭귀지로 통하지 않다는 걸 알자 그는 메트로놈의 손가락뿐 아니라 No! No! Noooo! 한국인도 아닌데 삼 세 번 단호하게 외친다. 그러나 공연의 열기 때문일까. 제발 그마아아아안!이라는 절규에 도리어 더 뜨거운 박수로 화답을 한다. 


완벽한 오해, 완벽한 조합. 말이 안 통하는 관객에게 무용수는 포기한다. 대신 관객을 완전히 제압하고 남을 역발산기개세 力拔山 氣蓋世 가히 초패왕 항우가 환생한듯한 퍼포먼스를 펼친다. 입신이라도 한 것일까. 훤칠한 키가 힘을 더하니 무대가 꺼질 것 같고 천장이 무너질 것만 같다. 손뼉으로 도저히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의 빠르기로 마그마의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아티스트에게 더는 관중이 보이지 않는다. 현란한 기타와 한 맺힌 절규만이 그의 고막을 내리치고 그 반향에 따라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 공연이기라도 한 것처럼 온 힘을 다할 뿐이다. 머리채는 젖은 지 오래다. 때는 겨울임을 잊게 할 정도로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보고 나온 손님들마다 가슴을 부여잡으며 세상에 이런 공연은 처음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럴 수밖에. 수십 수백 번을 본 전문 가이드도 처음인데 그분들은 오죽할까. 


참, 오로지 15명 만을 위한 공연이라니. (아, 일반 개인 관객도 네 명은 있었다. 그래도 20명이 채 되지 않는 소수.) 민망하긴 하지만, 잠시 주판알을 튕겨볼까. 오늘 수입은 19명. (그중에 한 명은 아동이지만 일단 동일 금액이라 가정해 보자.) 공연장비로 절반은 나갈 테고, 팀원만 다섯 명에 매니저도 있으니, 한 사람당 돌아가는 몫은 많아봐야 우리 돈 3~4만 원이지 않을까. 물론 얼마든지 변수는 있다. 변동일지 고정일지, 일회성이 아닌 일주일에 아니면 한 달에 몇 번 오느냐에 따라 계약 조건이 다를 수 있다. 수당도 모두가 동등할지, 비중에 따라 다를지 알 수 없다.


어찌 되었든지 간에 이들은 오늘 스무 명도 안 되는 청중을 두고 공연을 펼쳤다. 말도 안 통하고, 하지 말라니까 더 하라는 줄로 착각하고 본의 아니게 방해한 청중을 두고 말이다. 그럼에도 두 번 다시 못 볼 혼신의 힘을 사른 공연을 펼쳤다. 요령 부리지 않고 열정 그 자체로 소화해 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더 격한 공연을 펼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그 여운이 지금까지도 생생히 남을 정도로.


예술가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누군가의 평판을 받기 전에 자기가 자신에게 제일 엄격한 기준으로 심사를 들이대는 사람. 제아무리 타인이 칭찬해 줘도 본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스스로가 불만족스러운 사람. 반대로 남들이 아무리 혹평을 가해도 자신이 볼 때는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했다면 그것으로 자신에게 수긍할 수 있는 사람. 


예술가의 길이란 남이 아닌 내가 만들어가는 길.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하는, 그래서 극세사 팔랑귀를 펄럭거리며 일희일비하는 나에게 이름모를 무용수는 무엇이 중요한지, 인생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를 온몸을 불사르며 전해주고 있었다. 



목사진. 세비야 축제 포스터.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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