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가장 무모한 도전을 꼽으라면 안나푸르나 등반이다. 2014년 1월, 나는 네팔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학교에 앉아있어야 하는 대학교 생활에 진력이 나 무조건 떠나야만 했다. 한국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어디라도 좋았다. 인생에 한 번은 히말라야 등반을 하겠노라 생각했지만 그게 꼭 스물다섯 살 겨울이어야만 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때는 떠나야만 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등반은 인터넷으로 구한 한국인 동행 2명과 카트만두에서 고용한 셰르파 2명을 포함해 총 5명으로 시작되었다. 등반을 시작하는 지점은 여느 한국의 산과 같았다. 초목이 우거지고 군데군데 돌멩이가 굴러다니는 흙길을 걸었다. 그러나 첫 날부터 한 명은 감기에 걸리고 나는 뒤꿈치가 쓰라려 오기 시작했다. 평소 등산이라곤 안 해서 등반을 위해 경트레킹화를 샀는데 새 신발이라 길도 들지 않았고 내 발에도 꼭 맞지 않았던 것이다. 등산용품점에 가서 신어보고 샀으면 좋았을 것을 돈 아끼느라 대충 사이즈만 보고 인터넷으로 주문한 게 화근이었다. 하지만 겨우 첫 날부터 뒤꿈치가 쓰라리다는 이유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아프단 말을 하지 않았다.
둘째 날부터는 뒤꿈치가 본격적으로 벗겨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통증을 선사했다. 나는 발꿈치를 뒤축에 붙여보기도 하고 아예 멀찍이 떼보기도 하면서 통증을 줄여보려고 애썼다. 하루 500m 남짓을 올라가는 대여섯 시간의 트레킹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 해발고도 3,000m에 도달했을 때 처음으로 마을다운 마을을 만났다. 그 곳의 허름하고 어두운 약국에서 약사의 정성스런 손길로 치료를 받았다. 진물을 흡수하는 밴드를 붙인 것만으로도 날아갈 것 같은 해방감이 들었다.
3,000m 이상의 고도에서는 모든 길이 눈밭이었다. 어디를 둘러보나 햇빛을 받은 만년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늘과 태양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설산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말없이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렇게 가슴이 일렁인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감동과 별개로 고도가 높아지면서 추워지자 문제가 생겼다. 등반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아 경트레킹화는 방한도 방수도 되지 않았고 다이소에서 산 5,000원 짜리 등산용 장갑을 꼈더니 방한은커녕 손으로부터 열을 빼앗아 방출해버려 출발한지 5분 만에 손가락이 얼어붙고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다. 너무 놀라 다급히 셰르파를 불렀더니 곧바로 내 장갑을 벗겨 던지고 자기 손 사이에 내 손을 끼워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아플 정도로 내 손을 비벼대자 그제야 열이 발생하면서 손가락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왜 산에서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자를 정도로 동상을 방치할까 의아했었는데 그건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구했음에 안도했다. 그리고 일행에게 스패츠를 빌렸다. 일행의 트레킹화가 중목에다가 완전히 방수가 되는 소재였기에 나를 위해 배려를 해 준 것이다.
여러 사람의 도움과 더불어 등반은 계속 되었다. 스패츠가 있어도 무릎까지 쌓인 눈은 여지없이 신발을 뚫고 녹아 들어왔지만 계속 걸음을 걷는 한 내 발에서는 열이 발생했고 덕분에 얼어붙지 않았다. 몇 시간의 걷기 끝에 숙소에 도착해 신발을 벗으면 발과 양말에서 허연 김이 피어올랐다. 아침에 다시 신발을 신으려고 하면 전날의 땀과 눈으로 푹 젖어있던 양말과 신발은 동태마냥 꽝꽝 얼어 있어 식사를 하는 동안 난로 곁에 널어두었다 손으로 두들겨야만 했다.
더 높은 곳에선 또 다른 압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산병이었다. 뒷목이 묵직해진다 싶더니 이내 머리 전체가 터질 듯 아파왔다. 중간에 만난 셰르파 한 명은 고산병이 와서 안 되겠다며 도로 오던 길을 내려갔다. 하루 자고 다시 돌아온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두통에 이어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기온은 어제와 비슷한데 몸 안, 아니 뇌에서 추위를 느끼는 것 같았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리는데 열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있는 옷을 모두 꺼내어 열한 겹을 입고 이불 속에서 떨고 있을 때는 정말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서를 쓸까 했지만 살아서 이겨내야 한단 생각으로 유서는 쓰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니 다행히 오한은 사라졌다.
안 그래도 체력이 약한 편인데 뒤꿈치도 아프고 산소까지 부족해지니 발이 천근만근이었다. 자꾸만 느려지자 처음에는 나와 보조를 맞추어 주던 일행과 셰르파들도 우선 앞서 나가 있을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느릿느릿 걷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에 나밖에 없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과 눈, 나무 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아무런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지구에 있는 건지 우주에 있는 건지 그도 아니면 천국에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세상이 그렇게 고요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앞에 아무도 없으니 내가 잘 걷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꾸만 용기가 사라지려 했다. 나는 나약했고 소리쳐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
나는 단 한 가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발가락을 보며 걷는 것이었다.
나는 단 한 가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발가락을 보며 걷는 것이었다. 발가락을 보며 한 발을 들었다 앞으로 옮겨 내려놓고, 반대쪽 발을 들어 앞으로 옮기길 반복했다. 그냥 걷기가 지겨워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워낙 천천히 걸었기에 한국에서 등산을 하는 것처럼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프진 않았다. 하나, 둘, 셋… 백까지만 세고 쉬자…. 얼마나 세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아마 오천 걸음 남짓 되었을 때 그 날 정상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등반을 시작한지 근 일주일 만에 나는 5,418m의 안나푸르나 토롱라 패스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뭘 하든 힘에 부치기 시작할 때 안나푸르나의 적막한 눈길을 떠올린다. 마음속으로는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라고. 나는 거기에 한 마디 보태고 싶다. 방향을 정하고 한 발씩 걷다보면 어느 새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