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이웃이 없다. 이 아파트에 산 지 5년째지만 “아유, 장 보고 오시나 봐요. 뭘 많이 사셨네요”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말 붙일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말을 하는 건 언제나 엘리베이터뿐이다. 7층, 9층, 문이 닫힙니다.
그래도 볼 때마다 인사를 나누는 사람은 두 명 있다. 우리 아파트에서 일하시는 분들. 경비원 아저씨와 청소해주시는 아주머니. 아저씨는 인사 자체가 조금 쑥스러우신 듯 내 인사에 늘 조용하게 답해주시고, 아주머니는 인사에 꽤 적극적이셔서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크게 말씀해주신다.
나는 이 아주머니가 왠지 좋다. 그녀에게선 언제나 생의 활력 같은 게 감지된다. 방심한 순간의 얼굴에서도 삶의 지겨움이나 권태의 낌새는 읽을 수 없다. 내가 아주머니를 마주치는 때가 거의 아침이어서일까. 우리 사이에 오가는 인사에선 언제나 신선한 맛이 났다.
며칠 전엔 요가를 가려고 급히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데 엘리베이터 앞 복도 창가에서 아주머니가 떡을 드시고 계셨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빗자루와 빨간색 커다란 쓰레받기를 다리 옆에 기대두고 선 채로 오물오물 꿀송편을 잡숫고 계셨는데 내가 괜히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잠시 스쳤다. 기다란 복도식 아파트를 한 층, 한 층 쓸다가 여기 9층에서 잠깐 쉬시는 모양이었다.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아주머니는 “떡 하나 드세요” 하고 내게 꿀송편을 내미셨다. 하얀색 스티로폼 위에 담긴 분홍색과 하얀색 동그랗고 작은 송편 너덧 개. “아니에요, 괜찮아요. 많이 드세요.” 내 말에 그녀는 한 번 더 권해줬고, 그것이 빈말이 아니라는 게 실감이 나서 고마웠지만 나는 정말 그녀의 아침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방금 밥 먹고 나오는 길이라고 당당히 거짓말하는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나는 “고생하세요!” 쾌활하게 외치고선 그녀와 헤어졌다.
요가를 하는데 내 머릿속엔 보라색 포도즙이 둥둥 떠다녔다. 포도즙을 드릴걸. 그랬으면 정말 좋았을 건데. 그럼 아주머니가 목이 막히지 않았을 텐데. 떡이 더 잘 넘어갔을 텐데. “엘리베이터 오면 좀 잡아주세요” 부탁하고는 얼른 집에 다시 들어가 냉장고 맨 위 칸에 쌓아둔 포도즙 하나, 아니 두 개를 집어들고 나와서 건네드렸다면 참 좋았을 텐데. 올여름에 수확한 신선한 포도로 짠 100% 원액즙과 그 송편은 아마도 환상의 궁합이었을 게 분명하다.
나의 선의는 왜 매번 한 발짝씩 늦을까. 순발력이 부족해 뒤늦은 후회를 남기는 내 굼뜬 선의가 언제쯤 빠릿빠릿 움직여줄까. 그날 아침, 내 가슴팍 앞으로 쑥 들어오던 그 꿀송편의 재빠름처럼 나의 호의는 왜 빠르지 못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내 습관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랐다. 타인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도 일종의 습관이어서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그것이 적당한 타이밍에 순발력 있게 발휘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주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아주머니의 자동반사적 “떡 드세요”는 그러므로 그녀가 살아온 날들을 보여주는 습관이었고, 그 습관이 부유한 환경 속에서 꽃핀 것은 아닐 거라는 추측이 더해져 한층 더 고귀하게 여겨졌다. 많이 가져서 베푸는 게 아니라는 말, 맞는 말 같다. 선의란 건 별다른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의 단순한 습관 내지 태도일 뿐 아닐까. 그래서 어려운 일이겠지만.
“타인에게 친절하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당신이 모르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플라톤이 한 말이라고도, 작자 미상의 말이라고도 전해지는 이 문구는 대체 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해야 하고, 왜 모르는 사람에게도 선의를 베풀 수 있어야 하는지를 힘 있게 설득하고 있다.
사실은, 모두가 가엾다. 아주머니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지만,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때 창가에 서서 떡을 급하게 드시는 아주머니가 조금 짠했던 것 같다. 계단에라도 좀 앉아서 드시지. 아주머니도 내가 가여웠을까. 나만 아는 내 힘겨운 싸움이 아주머니에게도 보였을까.
상상 속에서 나는 아주머니의 떡을 먹었고, 아주머니는 내 포도즙을 드셨다. 우린 다정한 이웃이다.
ㅡ 월간에세이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