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우리가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잖아
마음에 드는 숙소도 예약하고, 그동안 알차게 모아놨던 항공 마일리지로 왕복 항공편도 야무지게 예약해 놓은 상태에서 우리는 광안리에서의 늦은 휴가를 마음껏 즐겼다. 가본 적 없던 맛집도 찾아다니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도 가고, 늦은 밤에는 클래식이 한껏 흘러나오는 스피커를 곁에 둔 채 광안대교가 보이는 야외 자쿠지에 따뜻하게 몸을 담그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부부가 아니었던가! 응당 로맨틱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부부로써의 도리(?)를 다하기도 하며 말이다. 우리의 여행엔 늘 먹구름과 비구름이 함께 한다는 알 수 없는 법칙을 친구 삼아 그렇게 광안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본 임신테스트기에 못 보던 줄 하나가 더 그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해가 채 뜨지 않은 10월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여보, 일어나 봐. 이거 내 눈에만 두줄로 보이는 거야?"
눈살을 한껏 찌푸려야만 희미하게 보이는 임신테스트기를, 아직 눈도 채 뜨지 않은 남편 앞에 들이대며 물었다. 남편은 안경을 들어 눌러쓰곤 미간에 힘을 주어 테스트기를 지긋이 노려봤다.
"아닌 거 같은데? 난 안 보여."
그럴 리가 없는데. 내 눈에는 분명히 두 줄인데. 임테기도 해본 사람이 안다고 했던가. 남편은 임테기의 두줄이 익숙하지 않아서 모르는 건가. 아니다, 이건 오류일 거야.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틀 뒤 다시 한번 임테기를 해보기로 했다. 얕은 상식으로 알아본 바, 2일을 기준으로 한 번씩 호르몬의 수치가 상승하기 때문에 임테기는 2일에 한번 꼴로 해보는 게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이틀이 흘렀고, 이른 아침에 눈이 떠진 나는 기대 반 확신 반에 찬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임테기 포장지를 뜯고 있었다. 그리고 1분 뒤. 나는 이틀 전 남편에게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물어보았다.
"여보, 일어나 봐. 이거 내 눈에만 두줄로 보이는 거야?"
테이블에 놓인 안경을 천천히 끼곤, 다시 한번 집중하는 눈빛으로 임테기를 쏘아보는 남편. 그런데 이번엔 남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틀 전에 했던 말을 하려는 게 아니구나.
"두줄인 것 같아!"
그렇다. 이번엔 기어코 두줄이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아이가 찾아온 것이다. 결혼한 지 4년이 넘어 찾아온 아이. 그래서 너무 기특하고 소중했던 아이. 매번 노력했지만 쉽게 찾아오지 않은 탓에 우리의 부족함을 수없이 돌아보게 했지만 결국 우리에게도 천사 같은 아이가 찾아온 것이다. 두 줄로 보인다는 남편의 말에 순간 머리가 아득해지고 눈앞이 깜깜했지만 이번에야말로 틀린 결과가 아니라는 생각에 호들갑을 멈출 수 없었다. 그날 아침 이후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임테기를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지는 두 줄을 보며 내가 진짜 임신했구나, 나 정말 임산부가 되는구나를 실감했다. 그러나 기쁜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바로 그것. 우리는 내년 4월에 제주도로 한 달짜리 여행을 떠나야 한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돌려보았다. 그래, 지금이 4주 차라고 하면 내년 4월까지는 6개월 정도가 남았으니까 그때쯤엔 임신 7개월 차가 되겠구나. 단순한 계산을 마치자마자 인터넷에 검색한 건 '임산부 비행기 탑승 가능 시기'. 혹시라도 비행기를 못 타게 되는 건 아닐까? 탈 수 있더라도 의사의 소견서가 필요한 건 아닐까? 제주도에 있을 때 산통이 오거나 급하게 산부인과를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떡하지? 금속 탐기지는 그냥 지나가도 되는 건가? 말타기 체험은 못하는 건가?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소소한 맥주 한 잔을 할 수 없는 건가? 아이에 대한 걱정과 꿈꾸던 제주도에서의 생활 중 몇 가지를 하지 못하게 될 거라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아,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그냥 산부인과에 가서 물어보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짓고 7주 차가 될 때까지 또다시 하염없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그렇게 몇 주를 기다려 드디어 첫 산부인과 검진일. 피검사를 하고 초음파를 마친 나에게 의사 선생님은 축하한다며, 임신 7주 차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질문 답변의 시간. 휴대폰에 빼곡하게 적어 온 질문 리스트를 켜놓고 의사 선생님에게 하나하나 꼼꼼하게 물어보았다. 다행히도 비행기는 탈 수 있었고, 혹시 돌아오는 시기가 더 늦어진다면 탑승에 관한 의사소견서를 지참해야 할 수도 있다는 답변과 함께 나의 제주도행은 제대로 된 진짜 확정을 받을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여러 글들의 의견이 모두 같았던 건 아닌지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난감했던 터였다.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보면 이렇게 간단하고 명확하게 확인될 것을 나는 왜 그리도 불안에 떨며 매일매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던 걸까. 예정대로 제주도를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나 제주도 가도 된대! 생각지 못했던 변수. 그렇지만 너무나도 행복한 변수를 앞두고 했던 수많은 고민은 그렇게 긍정적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