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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히 Apr 02. 2022

여보, 변수가 생겼어

이건 우리가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잖아

마음에 드는 숙소도 예약하고, 그동안 알차게 모아놨던 항공 마일리지로 왕복 항공편도 야무지게 예약해 놓은 상태에서 우리는 광안리에서의 늦은 휴가를 마음껏 즐겼다. 가본 적 없던 맛집도 찾아다니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도 가고, 늦은 밤에는 클래식이 한껏 흘러나오는 스피커를 곁에 둔 채 광안대교가 보이는 야외 자쿠지에 따뜻하게 몸을 담그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부부가 아니었던가! 응당 로맨틱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부부로써의 도리(?)를 다하기도 하며 말이다. 우리의 여행엔 늘 먹구름과 비구름이 함께 한다는 알 수 없는 법칙을 친구 삼아 그렇게 광안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본 임신테스트기에 못 보던 줄 하나가 더 그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해가 채 뜨지 않은 10월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여보, 일어나 봐. 이거 내 눈에만 두줄로 보이는 거야?"


눈살을 한껏 찌푸려야만 희미하게 보이는 임신테스트기를, 아직 눈도 채 뜨지 않은 남편 앞에 들이대며 물었다. 남편은 안경을 들어 눌러쓰곤 미간에 힘을 주어 테스트기를 지긋이 노려봤다. 


"아닌 거 같은데? 난 안 보여."


그럴 리가 없는데. 내 눈에는 분명히 두 줄인데. 임테기도 해본 사람이 안다고 했던가. 남편은 임테기의 두줄이 익숙하지 않아서 모르는 건가. 아니다, 이건 오류일 거야.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틀 뒤 다시 한번 임테기를 해보기로 했다. 얕은 상식으로 알아본 바, 2일을 기준으로 한 번씩 호르몬의 수치가 상승하기 때문에 임테기는 2일에 한번 꼴로 해보는 게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이틀이 흘렀고, 이른 아침에 눈이 떠진 나는 기대 반 확신 반에 찬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임테기 포장지를 뜯고 있었다. 그리고 1분 뒤. 나는 이틀 전 남편에게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물어보았다.


"여보, 일어나 봐. 이거 내 눈에만 두줄로 보이는 거야?"


테이블에 놓인 안경을 천천히 끼곤, 다시 한번 집중하는 눈빛으로 임테기를 쏘아보는 남편. 그런데 이번엔 남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틀 전에 했던 말을 하려는 게 아니구나.


"두줄인 것 같아!"


그렇다. 이번엔 기어코 두줄이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아이가 찾아온 것이다. 결혼한 지 4년이 넘어 찾아온 아이. 그래서 너무 기특하고 소중했던 아이. 매번 노력했지만 쉽게 찾아오지 않은 탓에 우리의 부족함을 수없이 돌아보게 했지만 결국 우리에게도 천사 같은 아이가 찾아온 것이다. 두 줄로 보인다는 남편의 말에 순간 머리가 아득해지고 눈앞이 깜깜했지만 이번에야말로 틀린 결과가 아니라는 생각에 호들갑을 멈출 수 없었다. 그날 아침 이후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임테기를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지는 두 줄을 보며 내가 진짜 임신했구나, 나 정말 임산부가 되는구나를 실감했다. 그러나 기쁜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바로 그것. 우리는 내년 4월에 제주도로 한 달짜리 여행을 떠나야 한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돌려보았다. 그래, 지금이 4주 차라고 하면 내년 4월까지는 6개월 정도가 남았으니까 그때쯤엔 임신 7개월 차가 되겠구나. 단순한 계산을 마치자마자 인터넷에 검색한 건 '임산부 비행기 탑승 가능 시기'. 혹시라도 비행기를 못 타게 되는 건 아닐까? 탈 수 있더라도 의사의 소견서가 필요한 건 아닐까? 제주도에 있을 때 산통이 오거나 급하게 산부인과를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떡하지? 금속 탐기지는 그냥 지나가도 되는 건가? 말타기 체험은 못하는 건가?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소소한 맥주 한 잔을 할 수 없는 건가? 아이에 대한 걱정과 꿈꾸던 제주도에서의 생활 중 몇 가지를 하지 못하게 될 거라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아,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그냥 산부인과에 가서 물어보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짓고 7주 차가 될 때까지 또다시 하염없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그렇게 몇 주를 기다려 드디어 첫 산부인과 검진일. 피검사를 하고 초음파를 마친 나에게 의사 선생님은 축하한다며, 임신 7주 차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질문 답변의 시간. 휴대폰에 빼곡하게 적어 온 질문 리스트를 켜놓고 의사 선생님에게 하나하나 꼼꼼하게 물어보았다. 다행히도 비행기는 탈 수 있었고, 혹시 돌아오는 시기가 더 늦어진다면 탑승에 관한 의사소견서를 지참해야 할 수도 있다는 답변과 함께 나의 제주도행은 제대로 된 진짜 확정을 받을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여러 글들의 의견이 모두 같았던 건 아닌지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난감했던 터였다.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보면 이렇게 간단하고 명확하게 확인될 것을 나는 왜 그리도 불안에 떨며 매일매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던 걸까. 예정대로 제주도를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나 제주도 가도 된대! 생각지 못했던 변수. 그렇지만 너무나도 행복한 변수를 앞두고 했던 수많은 고민은 그렇게 긍정적으로 막을 내렸다.



우리에게 찾아온 귀여운 밤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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