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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히 Apr 19. 2022

한라봉은 처음이라

귤을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디를 놀러 가건 기념품이나 기념이 될만한 것들을 구입하는 것을 좋아한다. 워낙에 무언가를 모으거나 선물하는 걸 좋아했던 탓에 집에 있는 냉장고에는 그동안 방문했던 여러 관광지들을 대표하는 자석들이 가득하고, 지인이나 가족들에게 선물할만한 것들이 없나 하며 소품샵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자주 발견(?)되기도 한다. 그중 제주도에 왔을 때 대부분 찾았던 것이 제주도를 대표하는 여러 종류의 귤이었다. 마지막 여행 때도 공항 근처의 농산물 재래시장에 들러 친정과 시댁에 보내드릴 귤을 박스채로 사서 택배로 보내드리기도 했었다.


제주도에는 다양한 종류의 귤들이 365일 판매되고 있다. 제주감귤은 물론 한라봉, 레드향, 천혜향 등 제주 산지에서 수확되는 다양한 종류만큼이나 각각의 맛과 특징들도 풍부해 수확시기마다 골라먹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난 한라봉을 먹어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니 조생귤이나 감귤이라 불리는 가장 평범한 귤들은 으레 겨울이 되면 박스채 사다 먹곤 했지만 오렌지만큼이나 크기가 크고 껍질이 두꺼운 독특한 귤들을 먹어본 기억이 도통 나질 않았다. 심지어 그중에서도 한라봉을 먹어본 기억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세상에! 내가 한라봉이나 레드향 같은 귤들을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니! 이름만 들어도 감귤만큼이나 익숙한 한라봉의 맛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스스로 꽤나 충격을 받았다. 


감히 내가 한라봉의 맛조차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운전 중인 남편에게 "우리가 지금 가는 길에 귤 파는 데가 있으면 좀 사줘"라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고, 이 말을 꺼낸 지 채 3분도 되지 않아 한적한 길가의 귤 상점이 눈에 띄었다. (이 정도면 100m 간격으로 귤 도매상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남편은 화려한 핸들링으로 방향을 꺾어 나를 귤 상점 앞에 내려놓았다. 


활짝 열린 문 틈으로 수북한 귤들이 보였다. 예쁘게 디자인되어 있는 선물용 박스가 겹겹이 쌓여 있었고, 맨 꼭대기에는 탐스러운 귤들로 가득 찬 선물박스가 우리에게 노란 윙크를 날리고 있었다. 다 먹어본 적 없는 것 같으니 이름이 가장 특이한 레드향을 먹어보자는 생각에 가게 주인에게 레드향이 무엇이냐 물어보았지만 안타깝게도 4월의 중순에 해당하는 지금은 한라봉과 천혜향이 집중적으로 수확되는 시기라 레드향은 없다는 대답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만 한라봉과 천혜향 중에 선택해야만 한다. 약 3초간의 묘한 긴장감이 가게에 흘렀고, 나는 결국 한라봉을 손을 들어주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한라봉처럼 생긴 귤껍질을 까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혜향은 마치 거대한 귤 모양을 하고 있어서 왠지 익숙한 모양이었고, 한라봉은 꼭지 부분이 마치 한라산 봉우리처럼 생겼는데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봐도 이 독특한 꼭지를 내 손으로 까 본 적이 없다는 판단에 단연 한라봉을 선택한 것이다. 거창한 것 같지만 소박한 이유, 나는 한라봉을 먹어본 적이 없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차에는 한라봉 한 박스가 실리게 되었다.


품종에 따라 조금씩 맛은 다르겠지만, 한라봉의 맛은 사실 내가 기대했던 바로 그 맛(?)이었다. 평소 약간 새콤한 맛을 좋아하던 식습관이 어디 안 간 모양이다. 적당한 단맛 사이사이에 슬그머니 숨어있는 새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이게 한라봉이구나!' 라는 감탄사를 자아냈다. 껍질을 까고 있는 오른손에 촉촉한 한라봉 즙(?)을 한가득 묻힌 채 귤 한쪽을 오물거리며 유채꽃밭을 지나가고 있는 그 순간이 한 장의 사진처럼 뇌리에 깊게 박혔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한라봉을 먹는 순간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겠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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