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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영 Oct 30. 2020

가성비의 시대에서

월요일 저녁이면 ‘생활의 달인’을 즐겨본다. 한 가지 일을 길게 하여 소위 ‘달인’이라 불릴만한 사람과 사연을 매주 소개하는 방송이다. 그중 숨겨진 식당을 소개해주는 ‘은둔식달’을 좋아한다. 제작진이 어떻게 수소문하는지 모르겠지만, 매주 소개되는 식당 주인은 한결같이 식재료에 지극한 정성을 쏟는다. 달인들은 방송에 홍보되는 일에는 딱히 관심이 없으며, 자신의 요리과정에 대한 설명과 과장도 적다. '뭘 이런 걸 찍나' 싶은 표정으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한다. 


하지만 식재료 하나에도 몇 번의 조리나 숙성을 거치고, 그런 식재료들이 모여야 요리가 되니 보는 사람은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저걸 무슨 수로 하냐?" 함께 시청하던 엄마는 번번이 고개를 젓는다. 도무니 끝나지 않는 달인의 과정은, 요리하는 팁처럼 단순히 옮겨올 수 없는 정성이다. 정성도 보통 정성이 아니다. 

     

유별난 과정으로 요리되는 메뉴는 의외로 김밥, 탕수육, 만두, 면, 빵, 떡 등 평범하다. 이 평범한 메뉴를 위해 달인은 새벽부터 밤까지 식재료를 가공하는 강도 높은 과정을 매일 반복한다. 식재료 하나당 최소 3~5번 이상의 과정을 거치지만, 모든 과정은 ‘맛’이라는 추상적인 결과물로 응집된다. 손님이 먹고 ‘이 집은 뭔가 더 맛있다.’ 정도의 인상으로 기억할 뿐이다. 달인들은 지금도 자신의 연구실에 있는 것처럼 스스로의 맛을 갱신해나가고 있다. 흡사 혼을 담고 있다고 해야 할까.

영혼 없는 맛과 영혼이 담긴 맛의 차이는 무엇일까. 혼과 정성을 담았을 때 우리는 그걸 구별하고 살고 있을까. 어버이날 아버지의 병실에 올라가기 전 꽃집에 들어갔다. 1층 로비에서 매일 보았지만 어버이 날이 되어서야 카네이션을 만지며 들어섰다. 만원, 만 이천 원이 써 붙은 카네이션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천 원 차이에 썩 만족스러운 화분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작지만 아름다운 카네이션 화분이 눈에 띄었다. 


"어, 이거 얼마예요" 나는 눈에 띄는 그 화분을 달라고 하였다. 

만 오천 원을 부르는 주인에게 "이건 뭔가 다른데요" 했다. 

"밖에 진열된 건 공장에서 나온 거고, 이건 제가 만든 거예요. 저 플로리스트거든요." 

주인의 정성이 담긴 꽃 화분을 들고 병실로 갔다. 아버지는 꽃을 보자마자 기쁨을 숨기지 못하며 활짝 웃으셨다. 병실에서 본 미소 중 가장 밝았다. 꽃값을 톡톡히 했다. 


집에 돌아가기 전 엄마 것도 하나 더 사려고 들렀다. 퇴근시간이 되면서 맨손으로 집에 가기 머쓱해진 사람들로 꽃집은 분주했다. 꽃집 주인도 바빠졌다. 아까 내가 사간 화분은 새로 만들어야 해서 기다리게 되었다. 그가 분주히 내가 주문한 꽃화분을 만드는 동안, 밖에 진열된 카네이션을 들고 온 사람들이 가격을 묻고 흥정하였다. 꽃집 사장님은 남는 게 없다는 볼멘소리를 하며 다시 나의 꽃 주문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무조건 싼 것만 찾아. 싸고 푸짐하고 큰 거. 

아름답고 이런 건 관심이 없어요." 

만원과 만 이천 원 사이에서 갈등하는 손님들은 꾸준했다. 공장에서 적당히 구색을 갖춘 카네이션에 비해, 그녀가 공들여 만든 화분이 밀려나는 건 씁쓸한 장면이었다.      


모든 가격을 소비자가 비교할 수 있게 되고, 현명한 소비자로 최저가를 찾아 클릭하는 것이 미덕이 된 오늘. 원가가 낱낱이 공개된 이후, 서로 따질 수 있는 금액에는 인건비만 또렷하게 남았다. 상대방의 수고와 들이는 시간을 이리저리 따져보는 정서로는 역시 삭막해질 수밖에 없다. 제작하는 이가 들인 수고에 대해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런 수고와 정성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푸념이 자리 잡는다. 상실되고 있는 건 최저가에 드러나지 않는 ‘아름다움’, 그것이 아마도 ‘영혼’이 담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도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의뢰들이 있다. 처음부터 작업 의도와 배경을 설명하면서 금액을 말하지 않는 의뢰들은 대부분 그랬다. 결국 작업 직전에 임박해서야 '예산이 좀 적지만 잘 부탁한다'라고 말하거나, 적은 돈이었음에도 깐깐하게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이번에 잘하면 다음에도 계속 거래하지 않겠나'란 뉘앙스를 풍기지만 그건 기약 없는 바람이다. 역시나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작업하는 입장에서 애쓰지 않고 적당히 하고 싶은 태도가 생긴다. 


생활의 달인은 나에게 쌓인 이런 냉소적인 태도를 뜨끔하게 한다. 세상은 그렇더라도 식재료의 잡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고집을 보면 절로 반성하게 된다. 효율과 가격을 중요시하는 세상의 공식과 반대되는 행동이다. 어쩌면 세밀한 차이를 아는 건 달인 뿐일지도 모르지만 꾸준히 맛을 추구해가는 일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인터뷰에서는 대체로 '돈을 받고 파는데 부끄럽고 싶지 않다’ 말한 달인이 많았다. 그리고 그 맛을 알아주고 꾸준히 가게 문을 드나드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현명한 소비자로 깎아내는 가격에는 상대의 수고가 포함되어 있다. 최저가 안에는 그런 보이지 않는 수고가 하나씩 사라져 버렸는지 모른다. 방송에 나오는 맛집은 주인장의 고집과 수고를 알아봐 준 주변 사람들 덕분에 탄생한다. 너무 판판히 드러나 버린 가격 리스트를 콕콕 누르면 배달되는 음식에서 이런 맛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서로가 기대하는 일말의 상냥함, 사람의 혼, 온기 이런 것은 보이지 않는 형태로 존재한다. 비가시적이지만 그런 고집을 유지하며 냄새를 피워내는 저 부엌 어딘가를 생각한다. 나도 내 그림의 순도를 높이고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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