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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영 Mar 24. 2023

돌봄과 작업 ; 조용하지 않은 겨울

겨울을 조용하게 보내는 일에는 제법 익숙해졌다. 몰아치는 일과 요청은 거짓말처럼 없어지고, 메일함과 카톡에 새로운 메세지가 뜨지 않으며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 고요함. '내 작업을 해내야지'하며 몇년간은 겨울의 고요함을 반갑게 맞이했더랬다. 몇년간 익숙해진 패턴을 깨어준 것은 가을에 태어난 아가였다. 파트너의 배가 누가봐도 '임산부다' 할 때부터, 새 식구가 들어설 집을 구하고 도통 모르겠는 물건들을 육아 유투브를 보며 이것저것 준비했다.


분명 내 눈앞에서 응애하고 태어나는 걸 직관하였는데, 영화처럼 눈물이 벅차오르는 아빠의 감정은 모르겠고. 송아지가 툭하니 어미소에게서 태어나는 다큐멘터리를 본 마냥 생생하고 생경한 어떤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본 관객이 된 느낌. '아빠가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분만실 간호사의 직업인다운 축하멘트를 듣고서야, 힘껏 울어젖히는 이 소리가 바로 나를 향하고 있음을. 매우 분명하고 거스를 수 없는 책임으로 나에게 도착했음을 일깨워 주었다. 정신차려!


녀석도 우리도 모든 것이 처음인 세명이 서로에게 익숙해지기까지. 밖에서 보면 아무일 없이 평온해 보일 집에서는 거실과 방, 화장실, 부엌을 오가며 아이를 들썩들썩 달래는 조용한 분투로 채워졌다. 조용히 작업에 몰입해서 책을 쓰거나 그려내던 작업하기 좋은 계절은, 밀려드는 집안 일로 밀도가 높았고, 익숙해지지 못한채 길었더랬다. 이전까지 느끼지 못한 겨울임은 분명했다. 밤낮없이 변화하는 날이 기본값이 되다가, 녀석의 잠이 일정한 패턴을 그려낼 두달즈음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백일날은 동이트는 쪽에다 꾸벅하고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삼신할머니. 땡큐.


어지러운 날들에도 파트너는 나의 작업을 존중해주었다. 반나절 가량은 어떻게든 책상에 붙어서 그림을 그렸다. 이전에 비하면 절반으로 줄어든 시간이지만, 해오던 작업을 이어갈 수 있음이 어디인가. 그런 생활에서 책<돌봄과 작업>이 끌리듯 읽혔다. 나보다 먼저 이 혼란을 살아온 사람들의 에세이다. 돌봄; 아무리 해도 티가 나지 않는 비가시적인 수고스러운 영역과, 작업; 자신의 커리어나 혹은 삶에서 지켜내고 싶은 장르는 분명히 반대편에 위치한다. 두 단어는 하루라는 한정 된 시간과 체력을 두고 대칭한다.


오늘날 부모가 되어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내적인 부침은, 소중하게 가꿔 온 나의 시간을 다른 존재에게 기꺼이 내어주는데에 있다. 자아를 찾고 자기개발로 생존해 온 세대가 그 경계를 허물며 혼란속으로 성큼성큼 찾아들어가는 장면은, 이제까지의 헌신적인 부모자식의 상과 다른 새로운 모습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마냥 이벤트 적이지도 않으며, <금쪽같은 내새끼>처럼 극단적이지만은 않을 가족의 이야기들는 다양한 모습으로 피어나고 있다.


나의 청년기가 길어질 수록 결혼을 보는 가치관은 비혼에 수렴되어 갔었다. 이미 맞본 '자유로움'을 내려놓을 이유가 없으며, 혈연으로 똘똘 뭉친 철옹성 같은 가족이 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를 책임지기에 세상은 각박했고, 미세먼지와 재난들 속에서 낙관할 수 없어서였다.





'응애'하는 순간 이미 페이지는 넘어가있었다. 마치 경험치가 다 차버려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버린 게임처럼 말이다. 잠시 검정 화면이 지나고 넥스트 챕터. '아 어뜩하지..'의 막막함이 밀려왔다가, 허덕허덕 살림퀘스트를 쳐내다보니 차츰 새로운 경험치가 쌓여갔다.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오니 천 기저귀를 써보자, 정도의 여유(?)가 생길즈음. 작업하다 나온 나를 무척이나 반가워 해주는 아기를 보며, 기쁨의 순간들이 고단함보다 더 또렷해졌다. 녀석의 얼굴이 풍경처럼 보일 무렵, 낯선 날들이 여전한 삶의 페이지 속에 있었음을 안도하게 되었다.   


나와 파트너도 너무 길고  겨울에 지쳐 쓰러져  무렵. 아기를 안고 바다를 보러 가겠다는  높은 레벨의 모험을 강행했다. 속초의 바다를 감격스럽게 보는  철없는 어른과, 이게 뭐라고 심드렁하게 보는 녀석. 지나가는 할머니가 '아유,  바다네 처음이다 처음'하며 가족사진을 찍어주셨다. 핸드폰  사진은 나의  가족앨범에서  이미지 처럼 상투적이었다. 활짝 웃고 있는 부모와 푹하니 심드렁하게 고개를 떨군 아가.  상투적인 장면속에 들어와 있었구나.


출근과 퇴근 같은 반복적인 노동에서 자유로워지고, 조금 더 빛나는 순간을 쫓으려 '작업'을 내세우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직업인이 되어 무엇이 작업이고 무엇이 노동인지 경계가 희미해졌다. 그냥 별일없이 유지되는 삶과 계절에, 혹은 한해가 무사히 지났음 정도에 안도하고 살고 있었다. 아버지의 큰 사고를 건너오며 삶을 지금처럼이라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보수적인 어떤 경계를 만들어 내었는지도. 그리고 더 나은 작업을 해내면 특별한 성취와 빛나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작업을 지속하는 이상 성취와 체념 사이에서 마음을 다잡는 하루가 최선이었을지도.  


바다를 배경으로 남겨진 이 상투적인 가족사진에는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다른 페이지의 감정이 보였다. 고요하고 평온한 고독함을 가까이 두는 작업의 시간과 너무나 반대편에 있는 장면. 유모차를 끌고 파도가 솨아아 밀려왔다 밀려가는 비수기의 휴양지를 걷는 날들 속에서, 나도 모르게 '아, 외롭지 않구나'하고 느끼던 바다였다. 작업과 돌봄은 서로 다른 인력으로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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