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쓰는 물건이었더라!
목 아래 셔츠 첫 단추까지 채우고 나서야 문밖을 나설 준비가 마무리된다.
봄답지 않게 내리쬐는 햇살이 시간이 갈수록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턱밑까지 차오르는 열기는 뜨거운 햇살때문이겠지만 꼭꼭 채운 셔츠와 목 언저리가 맞부딪치자 가슴이 답답해왔다. 셔츠 윗 단추를 풀었다. 긴장하고 있던 목의 근육이 순간 내려앉으며 어깨가 늘어졌다. 단추 하나를 더 풀었다. 무거워진 공기 속 숨어있던 바람이 셔츠 속으로 훅 들어왔다. 살 것 같다. '목걸이라도 하나 하고 나올걸...' 후회도 들었다. 썰렁한 목 언저리가 쑥스러웠지만 다시 단추를 채울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옷을 입는 습관은 사람마다 다르다.
정장을 좋아한다거나 운동복을 즐겨 입는다거나 하는 것이 취향이라면 습관은 좀 더 개인적이며 반복되는 행동을 동반한다. 반드시 재킷의 단추를 채운다거나, 셔츠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으면 불편하다거나 단추는 한 두 개쯤은 풀고 입는다거나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취향과 습관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습관이 반영되어 취향이 되기도 하고 취향이 세밀하게 나뉘어 습관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나는 셔츠의 단추를 꼭 끝까지 채우고 입는 습관이 있었다. 습관이 그렇다 보니 블라우스도 목 아래 늘어진 형태의 옷보다는 칼라가 있거나 목 부분이 정돈된 것을 좋아했다. 옷을 멋스럽게 입으려면 안 꾸민 듯 꾸며야 한다고 한다.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우다 보면 패션의 정석인 '꾸. 안. 꾸'는 불가능하며 차려입은 것보다 더 딱딱하고 경직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을 다 알면서도 셔츠 단추를 푸는 것은 너무나 어색한 일이었다.
또 다른 습관은 브래지어를 집에서도 꼭 챙겨 입는다는 거다. 속옷을 입는 일이 이상할 것은 없다. 집에서는 영혼까지 자유롭게 하기 위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잔다는 유명 연예인도 있다지만 흔한 경우는 아닐 거다. 어쨌거나 가장 편안해야 할 집에서조차 격식에 맞게 옷을 입을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집에서도 옷을 차려입고 입는 편이다. 브래지어를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브래지어에 대해 나보다 일찍 자유로워진 것은 엄마도 아니고 딸아이였다. 엄마는 집에서야 편하게 입고 계셨지만 외출을 할 때에는 그렇지 않으셨다. 외출 시 브래지어를 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아도 되는가가 뜬금없이 논쟁거리가 되던 즈음, 함께 외출을 한 딸아이가 지하철에서 귓속말로 내게 말했다.
"엄마, 나 브래지어 안 하고 나왔어. 그냥 집에서 있던 대로 나와서 나도 잊어버렸나 봐. 근데 편해.ㅎㅎㅎ"
이건 뭐지? 난 아이와 함께 있는 내내 아이의 윗옷에 초집중을 하고 있었다.
"좀 그만 봐. 옷에 구멍 나겠어. 누가 본다고 그래?"
언제부터 시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집에서는 브래지어를 벗는다. 아직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외출을 하는 것은 용기 나지 않는 일이지만 집으로 들어오는 순간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브래지어를 벗는 일이다. 브래지어는 벗는 순간, 이상하게 몸이 개운하고 편안하다. 이 속옷의 기능은 체형을 보정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해주는 것에 있다. 한편으로 여성성을 강조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브래지어에 일명 '뽕'을 덧대어 가슴의 크기를 키우기도 한다. 그렇게 소중한 브래지어가 벗을 때 비로소 자유롭고 편안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요즘은 셔츠의 단추를 다 채우지 않는다. 야성미 흘러넘치게 단추 세 개쯤은 풀어헤치고 - 셔츠 안에 탑이나 이너를 입기는 하지만 - 밖을 나선다. 풀어진 셔츠 단추의 효과는 컸다. 경직된 어깨가 몽글몽글해지고 걸음이 여유로워졌다. 구두를 벗고 갈아 신은 운동화는 발끝에 자유를 줬고 가슴을 옥죄고 있었던 브래지어는 숨이란 것을 제대로 쉬게 했다. 비밀이지만 가끔, 아주 가끔 브래지어를 잊고 외출을 하기도 한다. 누가 볼까 봐 드는 걱정보다 브래지어를 안 했다는 것이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편안함이 더 큰 만족을 준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 불편한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이 물건이 원래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