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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들 Mar 09. 2020

벵에돔 조림

3.



민수는 남자의 말을 짧게 되받고는 잔에 남아있는 와인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남자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는 의자에 등을 받쳤다. 방안을 대충 둘러보더니 민수에게로 시선을 굳혔다. 그윽한 눈, 민수는 그 안에 든 것이 바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막 알게 된 참이었다. 만화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숙소가 제공되는 식당에서 일을 하며, 감사의 표시로 싱싱한 생선을 잡아다주기도 한다는 것을. 남자는 일렁이는 바다를 들여다보며, ‘낚시왕’을 구상할 것이다. 바다가 주는 어떤 감회에 젖어들 때는 그것을 얼른 메모했다가, ‘낚시왕’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대사로 써먹을 것이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문양이 멋져서가 아니라 요리해놓고나면 맛있어서 그 물고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민수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남자에게 물을 ‘바다’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남자의 눈을 쳐다보는 동안 남자는 몸이 달아 어쩔 줄 몰라 했다. 민수는 식어버리기는 했어도 가시진 않는 취기를 느끼며 엄지손가락으로 남자의 아랫입술을 쓸어 만졌다.          



**     


“형도 들어서 대충 알잖아, 민수 스타일.”

“알지. 근데 내 말은 민수쌤이 뭘 하고 다니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이거야.”

“어떻게 상관을 안 해.”

“왜, 상관을 왜 하는데. 끝난 지가 언젠데.”     


형철과 영민의 표정은 대조적이었다. 초조한 얼굴로 소주를 따르는 영민 맞은편에 지루해보일 정도로 무감한 얼굴의 형철이 앉아 있었다. 영민은 하루종일 저기압이었다. 정확히는 형철을 통해 민수의 결근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였다. 오후 5시가 되도록 민수가 출근하지 않자 영민은 결국 부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무슨 사정이든 자기보다는 형철에게 연락했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민수는 영민에게 작은 틈도 주지 않는다. 형철에게 ‘민수쌤 몸이 안 좋대. 수업도 없다길래 쉬라고 했어.’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영민은 대번에 불안해졌다. 직감적인 불안이었다. 민수는 웬만하면 몸살이 나는 법이 없었다. 감기도 잘 들지 않았다. 하지만 평정을 유지하는 몸에 비해 마음의 건강은 위태로운 편이었다. 하룻밤 사이를 두고도 완전히 결이 달라지곤 하는 민수였다.     



옛날부터 그랬다. 급격히 기력을 잃는 날이면 민수는 ‘부재중’이 됐었다. 자리를 비우고 연락을 받지 않았다. 수업에도, 아르바이트하는 교내 카페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날이면 영민은 조교 사무에서 몇 가지 실수쯤을 꼭 저지르고야 말았다. 민수에게 수십통의 전화와 문자를 넣느라고 정신이 산란했다. 민수는 보통 하루이틀 정도가 지나 태연한 몸짓으로 돌아왔다. 똑 또독 똑똑. 학과사무실에 그런 간격의 노크음이 들리면 가슴이 철렁했다. 저 문이 열리고 갸우뚱 고갯짓을 하며 나타날 사람이 민수이기 때문에. 영민과 눈을 맞추며 씩 웃는 민수의 손에는 간식거리-영민이 좋아하는 베이커리에서 산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언제인가는 한번 그 일로 크게 다퉜었다. 민수가 사는 빌리가 있는 골목에서였다.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있는 쪽은 영민이었다. 말만 해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우냐, 내가 네 남자친구인데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주는 게 예의이지 않느냐, 이렇게 갑자기 며칠씩 연락이 안 됐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연락하는 게 뭐하는 짓이냐, 까지 쉬지 않고 쏟아내던 영민은 멈칫했다. 연락이 두절되는 건 미치도록 화가 났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연락’이 오는 일마저 없어진다면 그건 정말 견딜 수 없을 텐데, 말실수를 했나 싶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영민은 숨을 고르며 민수의 눈치를 봤다. 말없이 담배를 피우는 옆얼굴이 청초했다. 영민은 그냥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민수를 안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또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는 없었다. 민수는 끝까지 다 태운 담배를 시멘트벽에 비벼 껐다. 영민을 올려다보는 민수의 눈에는 아무런 기색이 없었다. 영민은 그게 마음이 아팠다. 자신이 화를 낼 때마다 한없이 멀어지는 민수. 같이 싸워주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억울해하지도 변명하지도 않고 그냥 멀어지는 민수.     


“매번 똑같아. 바다에 가.”


민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영민은 누그러진 기운으로 되물었다.


“바다?”

“응. 갈래?”     


바다 가까이에서의 민수는 또 달랐다. 보드랍고 너그러웠다. 시원하게 웃었고 서글프지 않은 얼굴로 울었다. 가사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영민에게 더 잘 안겼다. 둘은 해가 기울어질 때 쯤 매트를 챙겨 모래사장으로 나갔다. 바다 쪽을 향해 나란히 앉았을 때, 민수가 오른팔에 얼굴을 가져다대고 부볐을 때, 영민은 가슴이 쿵쿵거릴 정도의 행복감에 차올랐다. 민수가 하나도 밉지 않았고 오히려 지금까지 민수를 너무 몰라줬구나 싶은 생각에 미안했다. 민수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함께 바다에 오겠노라 결심했다. 영민은 왼손을 뻗어 민수의 볼을 쓸었다. 맥주를 두 캔 비운 민수는 따끈따끈했다. 빤히 올려다보는 눈, 끝이 동그랗게 빨개진 코, 건조하고 도톰한 입술.

예뻐도 너무 예뻐, 영민이 말했을 때, 민수가 다짜고짜 영민의 무릎을 손으로 짚으며 눈앞에 얼굴을 바싹 붙였다. 영민의 시야에 민수의 눈코입이 꽉 들어찼다.


“사랑해.”     


영민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처음이었다. 민수의 입에서 그 얘기를 정확히 그 단어로 듣기는 정말 처음이었다. 영민은 때로 민수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생하게 느꼈지만 그러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소리로 분명하게 듣는 건 특별한 일이었다. 듣고서 보니 그랬다. 상기된 얼굴빛의 영민에게 민수가 선뜻 입을 맞췄다. 경직됐던 근육이 이완되며 영민의 몸은 빠르게 뜨거워졌다. 바닷가에서 시작된 입맞춤은 또 다른 곳에서 길고 깊게 이어졌다. 그날의 부들부들하고 향기롭고 열띤 민수를, 영민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민수는 오늘 바다에 가 있을 터다. 분명 그렇다. 영민은 형철로부터 소식을 듣자마다 민수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몸이 안 좋다면서. 괜찮아?’

민수가 금방 답을 보내왔다.

‘죄송해요. 내일은 정상출근 하겠습니다.’

민수는 영민을 완벽히 상사로만 대했다. 그 사무적인 태도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지만 영민은 노력했다.

‘밥은 먹었어? 죽이라도 사다줄까?’

민수가 집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답장은 한 번으로 끝이었다.


영민 앞에는 벌써 빈 병이 두 개였다. 영민이 고개를 한번 털며 눈을 부릅뜨고 시계를 들여다봤다. 11시였다. 민수는 하루 종일 바다 주변을 맴돌았을 거고 어쩌면 오후 4시쯤에 누군가 말을 건네왔을 것이다. 이상한 사람은 아니라고, 혼자 왔느냐고. 그 사람하고 얘기를 좀 나눴을 거고, 그렇다면 분명, 분명히 민수는 또 이목구비를 활기차게 움직이며 여러 가지 표정을 짓고, 그러다가 갑자기 조용해져서는 돌연 사는 게 무료하다고 얘기하고, 오후 6시쯤. 그럼 그 남자는 민수에게 근처에서 술 한 잔 하겠느냐고 물었을 거다. 남자새끼들이란.


영민은 새 소주의 뚜껑을 돌려 열었다.


술을 마시면 유난히 붉어지는 민수의 눈가와 목덜미, 그걸 그놈이 봤을 거고. 민수의 잡담, 바다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교토 이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아니면 최근 읽은 책 속에 나오는 인물의 귀여운 면모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꽤 열성으로 호응했을 것이다. 호감을 얻어 내기 위해 얼마든지 더 들어주려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을 끊임없이, 끊임없이. 그러다가 민수의 말수가 줄어들면, 마침내 때를 봤을 것이다. 괜히 한번 민수를 따뜻하게 쳐다보고, 별로 흐트러지지도 않은 민수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씨발. 진짜…. 미치겠어, 형.”

영민은 또 한 잔 마셨다.


“그만 좀 해. 아프대잖아. 집에서 쉬겠지.”

형철은 차갑게 대꾸하고 소주를 털어 넣었다.          


**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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