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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들 Mar 09. 2020

벵에돔 조림

4.




영민은 새 소주의 뚜껑을 돌려 열었다.

술을 마시면 유난히 붉어지는 민수의 눈가와 목덜미, 그걸 그놈이 봤을 거고. 민수의 잡담, 바다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교토 이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아니면 최근 읽은 책 속에 나오는 인물의 귀여운 면모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꽤 열성으로 호응했을 것이다. 호감을 얻어 내기 위해 얼마든지 더 들어주려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을 끊임없이, 끊임없이. 그러다가 민수의 말수가 줄어들면, 마침내 때를 봤을 것이다. 괜히 한번 민수를 따뜻하게 쳐다보고, 별로 흐트러지지도 않은 민수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씨발. 진짜…. 미치겠어, 형.”

영민은 또 한 잔 마셨다.


“그만 좀 해. 아프대잖아. 집에서 쉬겠지.”

형철은 차갑게 대꾸하고 소주를 털어 넣었다.          


**          



지난밤 남자의 벗은 몸은 분명 젖은 모래 같은 구석이 있었다. 단단하고 굴곡이 많았다. 몸에 닿는 피부의 감촉은 부드러웠다가 거칠었다가 다시 부드러웠다. 근육의 움직임이 민수를 몸서리치게 했다. 민수는 그가 바다로 나가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바닷속에서 물질하는 장면, 젖은 몸으로 해변에 드러눕는 장면, 바로 그 자리에서 민수와 몸을 섞는 장면이 생생하게 이어졌다. 일이 끝나고 민수는 녹아들 듯이 잠에 빠졌다.

      

샤워볼을 문지르며 지난밤을 떠올렸다. 최근 몇 개월 간 나누어본 관계 중에 가장 열렬했고 그 감촉들이 지금도 선명했다. 하지만 그가 ‘강백’이라는 필명을 가진 일 년짜리 어부라는 사실이 여전히 민수의 마음을 미적지근한 자리에 붙들어맸다. 이제 다시금, 민수가 알고 있는 어느 누구도 바다가 아니었다. 민수가 느끼는 건 되돌릴 수 없는 실의였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남자는 옥상에서 이불을 털고 있었다. 민수를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일어났어요? 해가 좋아서 이불 좀 널어두려고요. 커피 마실래요?”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들어가 짐을 쌌다. 휴대폰의 홈 버튼을 누르자 알림이 수두룩했다. 그중 부재중전화가 11통이었다. 9통은 ‘탑학원 김영민팀장님’이었다. 1통은 ‘엄마’, 그리고 1통은 ‘탑학원 한형철부원장님’이었다. 메신저를 열어 안 읽은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민수야 나는 자꾸만 거슬러 올라가게 돼

이제 실제로는 없는 곳인데 나는 자주 거기로 가

니가 너무 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

그냥 나는 너 없이는 잘 안 돼

다시 잘해보자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불편해하지는 마

사라지지 마 내일은 아니면 모레는 다시 나와줘>     


<민수쌤. 걱정 돼서 전화했어요.

너무 늦은 시간에 실례했네.

내가 민수쌤 건강식 챙겨 먹인 지 좀 된 것 같은데.

맛있는 것 한번 같이 먹지요.>     


민수는 화면을 끄고 겉옷을 챙겨 옥상으로 나갔다.

남자는 벤치에 앉아서 민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수가 나오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민수에게도 한 개비 건넸다. 캠핑장에서 쓸 법한 스테인리스 잔에 블랙커피가 담겨 있었다. 민수는 말없이 하얀 김이 오르는 커피를 마셨다. 뜨거운 것이 식도로 넘어가며 가슴, 배에까지 온기를 불어넣었다. 날이 밝을 때 보니 옥상 난간 너머 저 멀리로 바다의 수평선이 선명했다. 잠잠하고 반짝이는 바다였다. 힐끗거리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민수는 바다에 눈과 몸의 방향을 더욱 고정시켰다. 잠시 뒤 민수가 빈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일어서자 남자도 따라 일어났다.


“바로 가시면 터미널까지 태워다드릴게요.”

“괜찮아요.”

“저도 태워다드리는 거 괜찮아서 그래요.”     


민수가 두 번 거절 않고 그러라고 하자, 짧은 찰나 남자의 갈빛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차 안에서도 침묵은 이어졌다. 민수는 그저 얼른 커다란 버스의자에 파묻혀 졸고 싶을 뿐이었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민수 옆에서 남자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 저, 혹시 서울 어디 사세요?”

“상암이요.”

“아, 상암! 마포쪽이죠? 저 예전에 은평쪽에 살았었는데.”     


정말이지 남자는 민수가 처음에 생각한 만큼 재미없는 말씨를 썼다. 웹툰 작가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민수는 대답조차 않았다. 그러자, 남자가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좀 더 본격적인 이야기였다. 터미널이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민수씨.”

“네?”

“혹시 휴대폰 번호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잠깐의 간격을 두고 민수가 대답했다.     


“저희가 만날 일이 또 뭐가 있겠어요.”     


남자는 당황한 것 같았다. 하루 사이에 민수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남자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저만 좋았나요?”     


민수의 입에서 얕고 무기력한 한숨이 튀어나왔다. 두 눈이 감기고 미간에 주름이 졌다. 별다른 말도 없이 명함을 콘솔 박스에 넣었을 때는 남자도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대화가 끊겼고, 어제 둘 사이를 장악했던 오묘한 기류는 이제 멎어있었다. 민수는 표정 없이 차창 너머를 응시했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한 번 더 민수를 불렀다. 이 상태로 헤어지면 정말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아서였겠다. 민수씨, 제가 연락해도 되죠? 하고 남자가 말했을 때, 민수는 건조한 얼굴로 저도 어제 좋았어요, 하고 대답하며 차문을 닫았다. 민수는 곧장 버스에 올라탔다. 앞으로 서너 시간을 멈춰있는 기분으로 달릴 것이다. 어느 틈엔가 잠에 빠질 거고 눈뜨면 서울일 것이다. 모든 것은 그대로이다. 언제나처럼 다시 원점일 것이다. 아니, 원점마저도 아닌 무엇일 것이다. 인생에서 뭐 하나라도 달라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된 것이 원점일 수는 없다. 어쨌든 돌아가야 한다. 영민에게로. 형철에게로. 시트러스 향이 도는 민수의 방으로.

민수는 휴대폰을 열었다. 영민에게 답장을 보냈다.     


<알아요 다 알아요>     


형철에게도 답장을 보냈다.     


<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언제 시간 되세요?>     


민수는 의자 시트를 깊게 뉘었다.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창밖을 구경했다. 풍경들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수채화 같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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