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4등>
1. 사람이란 일면 얼마나 연약한지, 자기 상처의 모양대로 다른 이를 상처 입힌다. 불행을 겪어본 사람은 그것이 새겨진 몸과 마음을 가지고서 살아야 한다. 그 사실을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한다. 봤고 들었고 둘러싸였고 두드려맞았던 그 불행이 여전히 나의 일부임을 알고 보살펴야 한다. 내버려두면 얼마든지 더 자란다. 불행까지를 포함하여 자기를 많이 돌보고 스스로에게 친절해져야 한다. 자칫하면 주변으로 쉽게 옮겨 붙는 게 불행이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당한 아픔을, 나로 인해 다른 이가 비슷하게 겪게 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너무 쉽다. 어려운 것은 그 반대의 일이다. 스스로의 상처를 낫게 하려고 애쓰지 않는 한 언제나 누군가에게 상처 입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2. 절실하다는 말이 주로 승리를 쟁취하려는 상황에서 쓰인다는 생각을 한다. 이기기 위해서는 절박해야 하고, 절박한 사람은 이기게 된다는 건 일종의 구호이자 믿음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이기고 싶지는 않지만 절실한 사람들의 단어를 빼앗는 일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의 가뿐함을 느끼기, 많이 웃기,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기기, 괜찮은 기분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아름다운 상상을 잃지 않기, 그런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몇몇은 진심을 다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바람이 ‘절박’한 무엇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기고 싶은 대상이 떠오르지 않으므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걸 두고서도 그게 중대한 소망으로서는 마땅하지 않다고 여겨버리는 것이다. 무엇이 더 너를 간절하게 만드는지, 무엇이 네가 쟁취하려는 삶인지 나는 모른다. ‘너’와 ‘나’를 바꿔 말해도 마찬가지. 모른다는 것만 알면 되는 일도 있다.
3. 단 하나의 장면: 레일의 경계, 수면 위아래의 경계가 무너진 공간에서, 물고기처럼 식물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유영하는 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