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지전 무명용사의 이야기
자네들 왔는가. 어서 오게, 날씨가 참 좋아. 어제 그제는 갑작스레 추워졌더군. 병영에서 애먹지 않았나. 한 사람 한 사람 다 귀한 손들인데 말이야. 예까지 찾아와주어 고맙네. 험한 길 살피고 행여 지뢰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 했나. 다시 한 번 고맙네.
오래 기다렸어. 자네들의 선배, 선배의 선배들이 군 생활할 때부터 기다렸지. 여기에 누워지낸지도 벌써 70여 년이 넘는구먼.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지. 내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멀리서나마 지켜봤지, 뭔가. 휴전 조약부터, 남북의 각축전이랄까. 휴전 협정을 위반한 국지전은 사뭇 벌어졌고 서로의 지도자를 축출하려 공작은 물론 특공대도 보냈다는구먼. 뭐? 처음 듣는다고? 그럴 수 있지 자네들은 몰라도 되네.
내 몸 누인 곳에서 좀 더 걸으면 휴전설 철책이지? 동족끼리 서로 총부리를 맞겨누고 수십 년 세월. 누가 상상이나 했나. 내가 징집되어 나갈 때는 이 전쟁이 금세 끝나는 줄 알았다네. 강제로 끌려간다는 것 말고는 내 기분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어. 해방 후 조금은 지리멸렬했거든. 남고 북에서 서로 다른 정부가 세워지고 서로가 서로의 정통성, 존재 같은 것들을 비난했단 말이지. 전쟁으로써 이 분단의 사슬을 끊어보자, 내 또래 징집자들은 대체로 이런 느낌이었을 거야.
물론 가족들이 눈에 밝히지 뭔가. 어머니, 아버지 일찍 결혼한 사람들은 처와 자식까지. 아무리 우리 예상에 금세 끝날 전쟁이겠거니 해도 전장에서 ‘죽음’은 늘 예비해야 하는 것 아니던가. 신병 훈련을 받을 적에 머리카락을 조금 오리고, 손발톱을 깎아 집으로 보낸다는 소포 박스에 담을 적엔 조금 두렵고도 처량한 기분이었네.
자네들의 군 생활은 어떠한가. 그것도 궁금하네. 아무래도 자네들은 전국 각지, 산지 사방을 돌아다니며 땅을 파는 작업이 주를 이루다 보니까 자대 생활에 큰 애착이 없을 수도 있겠구먼. 그래도 내무 생활은 어떠한가. 고참이 신병이나 후임을 괴롭히지는 않고? 아, 요즘은 그렇게 하다가는 영창에 끌려간다고? 그래 가지고 군 기강이 잡히겠나. 너무 과하게는 말더라도 얼마간 군대에는 영이 서야 하는 걸세. 아, 이 사람이 종작없이 떠들어댔구먼.
이제 작업을 시작해야겠군. 장비가 굉장히 많구먼. 다 쓰임새가 있을 테지. 70여년이 지난 조국의 모습은 발달된 첨단 도시같아. 그 하나씩 들고 다니는 게 뭔가? 워키토키 말고 말이네. 아 전화? 그것이 전화로군. 전화 안에 형형색색의 글자들과 사진이 보이는데, 그게 정말 전화가 맞나?
하하, 이래 봬도 내가 읍내에 새로운 물건이 등장하면 제일 먼저 쓰거나 타보기로 유명했던 사내라네. 자전거도 우리 부락에선 내가 제일 처음 탔을걸. 자전거쯤이라고? 도라꾸는 어떤가? 것도 우리 사돈네에서 지입 기사 사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정사정해서 탔네. 일제 카메라도 조금 만져보고 말이네.
그러다 징병이 된 거네. 초기엔 낙동강 전선을 방어했지. 사력을 다해서 막아내는 데 참 인민군이 무슨 벌떼나 개미떼 같았네. 쏴도 쏴도 줄지 않았다는 의미였지. 돌이켜보면 6.25당시 내 보직은 주로 전선을 방어하는 임무였네. 낙동강 전선을 방어해내고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북진을 하게 됐지. 그땐 정말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줄 알았네. 누구 말마따나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는 기세였으니 말이네. 하늘엔 B29가 우리를 지켜주고, 사기가 충천하던 무렵이었네.
신의주 지나 혜산이라는 곳에 우리 영토를 수복한다는 깃발을 꽂으려는 데, 자네들도 아다시피 중공군이 참전했네. 꽹과리 같은 악기를 쳐대면서 내려오는 데 1월 칼날 같은 날씨와 더불어 굉장한 공포였지. 정말 무서웠어. 사내대장부가 뭘 그리 저기했나, 누가 수군대면 뭐라 할 말이 없을 테지만 말일세.
자네들 함화(喊話)란 말 들어봤나? 팔로군일 적 중국 인민해방군이 장개석의 군대나 일본군에게 했다는 전술 가운데 하나인데 크게 소리치면서 갖은 욕과 비난을 해대는 것이지. 뭐라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중국말(좀 시끄럽나)을 몇 만 명이 외치면서 짓쳐 내려오니 다리가 다 후들거리더군.
그래도 다행히 후방으로 후퇴할 순 있었네. 이 과정에서 내 전우들 몇이나 당하고 상한지 모르겠네. 아마 그 혜산부터 이북땅 곳곳에도 녀석들이 묻혀있을 텐데 그이들은 언제나 찾을 수 있을지.
어떻게 이곳에 남게 됐냐고? 그렇지, 묻혔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 테니까. 이 오랜 선배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줘서 고맙네. 그렇게 후방으로 후퇴를 했다가 시간을 보내고 다시 전방으로 가라는 명령서를 받았지. 상처는 다 아물었고 동료를 지키지 못했단 자학도 줄었을 즈음이었어.
그렇게 오게 된 곳이 여기, 강원도 김화라는 곳이네. 당시엔 고지전이 한창이었지. 때는 이제 곧 휴전을 하기 달포쯤 전이었네. 휴전협정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우리 대통령이 거제도 반공포로들을 전부 석방해서 중공군과 인민군들의 성이 잔뜩 났네. 꼭 이맘때 약오르는 고추처럼 말일세.
그렇게 하루는 인민군의 깃발이 하루는 우리 군의 깃발로 바뀌는데 우리 군의 차지였을 적, 소련의 미그기가 일제 폭격을 감행했네. 그렇게 고지를 지키다 이곳에서 나가지를 못한 것이지. 그밖에는 무에 있겠나. 가족들이 보고 싶고 그런 거지.
이렇게 와주어 고맙네. 이제 나는 나갈 수 있는 건가. 나가고 나면 어떤 절차를 밟나? 내 유골에서 뭔가를 골라내 내 가족들을 찾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고맙네, 정말 고마워. 이제는 원도 한도 없네.
“강원 김화 저격능선에서 순직하신 선배님을 경건히 모시겠습니다. 전체 차렷! 선배님께 대하여 경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