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환희 Mar 20. 2022

그해, 은성이

*허구입니다. 


긴장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그간 했던 봉사는 어르신들 요양원과 보육원 정도였다. 이른바 비장애인들과 마주하는 식이었다. 이번 봉사는 장애인을 상대로 해나가야 하는 봉사였다. 나는 그들과 친숙하지 못하고 그들은 나에게 익숙하지 못했다. TV같은 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전에 공부가 필요했다. 

  신체 장애인과 정신 장애인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고 했다. 부르는 이름에 따라 장애인들을 비하하거나 대상화시킬 수 있다고 하니 조심해야 했다. 자폐증이나 다운증후군 같은 장애인들은 매체에서도 많이 나오는 사람들이었다. 능숙한 센터 직원이나 자원봉사자, 그들의 가족들도 가끔은 쩔쩔 매는 모습이었는데 나 같은 초짜(!)가 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됐다. 

  그렇게 사전조사 혹은 공부를 하고 센터를 방문하던 날을 기억한다.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려는 시기였기에 날을 화창했고 더운 공기에 삽상한 바람이 섞여 불어왔다. 좋은 기운이 감지됐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일었다. 

  센터에 입장하자 병원에서 맡는 소독액 냄새와 약간의 고약한 냄새가 비벼져 끼쳐왔다. 아무리 쾌적하게 관리를 한다고 해도 장애인 분들이 한둘도 아니고 그들이 흘리는 분비물과 실금한 냄새가 없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기에 나는 금세 적응하게 됐다. 

  센터는 신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이 4:6정도로 거주하는 곳이었다. 센터장님은 처음 방문한 나에게 신체장애인들의 보조 역할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일종의 배려였으리라. 정신장애인을 케어 한다는 것은 많은 경험과 노력을 수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신체가 부자유하지만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는 이들에게 내가 어떤 존재와 역할로 다가갈지 고민되었다. 사실 이 문장을 쓸 때 ‘도움’이 될 지라는 표현을 쓰려다 타자를 번복했다. 

  은성이라는 아이는 초등학교 고학년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고 있었다. 센터에서 머잖은 곳에 있는 특수학교를 다니는 친구였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장애를 돌보아 주는 센터 선생님의 노력을 생각하며 반항기를 누르는 듯보였다. 저 나이대의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내지르려는 분노와 항의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은성이는 내게 서먹서먹하게 굴었다. 

  “나 보러 왔어요. 봉사시간 얼마나 할 거예요. 적당히 시간이나 떼우고 가세요.”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매웠다. 조숙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신체의 부자유가 아이의 정신과 정서를 빠르게 성숙시켰으리라. 

  “응, 너 보러 왔고. 봉사시간은 글쎄 오늘부터 며칠 되니까 아직 헤아릴 수가 없네. 그래 적당히 너랑 시간 떼우고 가야지 뭐.”

  나는 가만히 녀석의 말을 받아쳤다. 이때는 동정하는 태도를 취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이를 아이처럼 대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장애인 시설이나 아동 보육원 등에 갔을 때 그들의 삶을 내려보려 하고 그들의 인생을 동정하려 한다는 점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행태는 마치 어른이 영, 유아를 대할 때처럼 말투를 구사하는 것. 보육원에서의 경험에 비춰 봉사자나 선생님들이 그런 태도를 견지할 때 아이들은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다. 

  은성이는 의외라는 눈빛이었다. 그간 자신이 봐왔던 봉사자의 태도가 아니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말을 붙이기로 했다. 요행히도 은성이는 걷지 못한다는 약간의 신체 부자유, 장애만 있을 뿐 내가 오래도록 보아왔던 보육원의 친구들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밥은 먹었니. 오늘 반찬 디게 맛없던데. 맨날 이렇게 나오나.”

  약간의 위악을 떨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가장 빠르게 친해지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공동의 적(?)을 만드는 것이었다. 은성이는 눈빛이 돌변하더니 반찬이 너무 어른들 위주다, 우리가 먹고 싶어하는 이른바 가공육류 반찬은 잘 나오지 않는다 등의 말들을 쏟아냈다. 됐다. 이 정도면 녀석과의 Rapport가 시작되고 있었다. 

  휠체어를 밀어 센터 뒤편 뜰을 걷는다. 걸으며 요즘 아이돌 이야기, 모바일 게임 이야기, 좋아하는 이성 이야기 등을 건넨다. 처음엔 나를 경계하던 은성이가 신을 내며 말을 건넸다. 아마 녀석은 ‘봉사자’가 아니라 ‘말동무’와 자기보다 어른의 공감을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찌르는 냄새가 났다. 다리의 감각을 잃은 은성이가 용변을 본 것. 녀석과 만나고 처음으로 당황한 순간이었으나 은성이가 부끄러워하지 않게 휠체어를 살살 밀고 센터로 들어가 센터 선생님께 귓속말로 상황을 전하고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나도 수습에 함께 나서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첫날부터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낸 사람에게 그런 모습까지 비치고 싶지는 않을 것 같은 은성이의 마음을 헤아렸다. 용변 뒷수습은 녀석과 더 친해진 며칠 뒤부터 가능했다. 

  “선생님은 왜 나를 어려워하거나 조심스러워하지 않아요?”

  어느 날 은성이가 물었다. 뜬금없는 물음이었지만 장애인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편견어린 시선을 때리는 질문이라 생각했다. 

  “내가 너를 어려워해야 하나. 내가 너보다 조금 어른이고 그렇기 때문에 너를 어렵지 않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조심스러워하지 않느냐고? 니가 무슨 다이너마이트냐.”

  나의 답변이었다. 은성이는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는지 겉으로는 ‘치’하는 기색이었지만 내심 흡족해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 순간, 나의 비장애와 나이 그리고 은성이의 장애와 나이는 우리 사이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센터에서 어느 정도 경력(?)이 생기자 은성이 뿐 아니라 정신장애인들의 케어까지 번갈아 맡았다. 내 전화번호를 따간 녀석은 내가 센터에 와있는 날이나 그렇지 않은 날에도 이따금 메신저를 보내와 이런저런 일들을 물었다. 나는 되도록 분명하나 짧게 답하려고 했고 특별한 감정을 담지 않으려고 했다. 내 생활이 방해가 될 정도로 메시지를 보내올 때는 단호히 그러면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명민한 녀석은 내 말을 이내 알아들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한 시절은 흘러갔다. 은성이가 중학생이 된 후 다른 센터에 재활프로그램이 더 좋다는 소식을 듣고 센터 차원에서 이원을 보내게 됐다. 한창 사춘기에 물이 오른 녀석은 우리와 헤어지던 날에 눈물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했다. 가끔 톡을 보낼 거라며 답장 씹지 말라는 엄포와 함께 센터를 떠나갔다. 

  은성이가 자라면서 나 역시 자라게 됐다. 은성이가 그곳을 떠나면서 나 역시 자연스레 떠나게 됐다. 인생을 살면서 경험한 몇 안 되는 진짜 소통이었다. 봉사라고 하기엔 내가 머쓱한 일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자네들 왔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