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성 신화가 만든 자기파괴적 구조
11화. 일 때문에 죽는 사회
― 효율성 신화가 만든 자기파괴적 구조
죽도록 일하는 사회
새벽 4시, 도쿄의 오피스 빌딩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다.
"오츠카레사마데시타(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직장인들이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집에 도착해도 끝이 아니다.
스마트폰으로 업무 메시지가 계속 오고,
내일 회의 준비를 위해 다시 컴퓨터를 켠다.
어느 순간 그들은 깨닫는다.
일을 위해 사는 것인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느 날, 책상에 엎드린 채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과로사(過勞死)'다.
일본이 세계에 '수출한' 가장 부끄러운 단어.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과로사라는 말의 탄생
'과로사'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82년이다.
의사였던 우에하타 토시오(上畑鋭夫)가
과도한 업무로 인한 급성 심장마비 사망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용어였다.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의 정점에 있었다.
"회사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장시간 노동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부터 젊고 건강한 직장인들이
갑자기 쓰러져 죽는 사례가 늘어났다.
의학적으로는 뇌출혈, 심근경색 등으로 진단되지만
공통점은 극도의 과로 상태였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개별적인 사건으로 여겨졌지만,
점점 사회적 패턴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87년 후생성이 처음으로 과로사를
공식 통계에 포함시켰다.
- 연간 과로사 인정 건수: 300-400건 (정부 공식)
- 실제 추정 과로사: 연간 1만 명 이상
- 과로자살 인정 건수: 연간 200건 내외
- 노동재해 신청 대비 인정률: 약 30%
장시간 노동의 구조적 배경, 회사 중심의 사회 구조
일본의 직장 문화는 '회사=가족' 개념에 기반한다.
종신고용제 하에서 회사와 개인은
운명 공동체로 여겨졌다.
개인의 성공은 회사의 성공이고,
회사를 위한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문화에서 퇴근 시간을 지키는 것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 부족'으로 해석되었다.
상사보다 먼저 퇴근하는 것은 금기였고,
야근과 주말 근무는
성실함의 증거로 여겨졌다.
애매한 근로시간 관리
일본의 근로기준법은 주 40시간, 하루 8시간을
법정 근로시간으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36협정'(노사 협정)을 맺으면
사실상 무제한 연장근무가 가능했다.
특히 관리직은 노동시간 규제에서 제외되어
'명목상 관리자'로 분류된 중간관리자들이
가장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서비스 잔업'이라는 용어도 생겼다.
정규 근무시간 외의 업무를 무급으로 처리하는
관행이 만연했다.
인력 부족과 효율성 추구
1990년대 장기 침체 이후 기업들은
인건비 절약을 위해 정규직 채용을 줄였다.
적은 인원으로 같은 업무량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일상화되었다.
'효율성'이라는 명분 하에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고,
휴가나 병가를 사용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업종별 과로사 패턴
- IT·광고 업계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 개발을 위한
극한의 경쟁이 벌어지는 분야다.
'데스마치'라고 불리는 극한 프로젝트 스케줄이
일상화되어 있다.
2015년 전통 광고대행사 덴츠의 신입사원
다카하시 마츠리가 과로자살한 사건이
사회적 충격을 주었다.
월 100시간이 넘는 잔업과 상사의 괴롭힘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 운송업계
트럭 운전기사, 택시 기사들의 과로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장거리 운송에서는 연속 운전이 일상이고,
적절한 휴식 시간 확보가 어려운 구조다.
- 의료업계
의사와 간호사의 과로 문제도 심각하다.
특히 응급실, 수술실 근무자들은
생명과 직결된 업무 특성상
교대 근무를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 교육업계
교사들의 '부활동(방과후 활동)' 지도,
각종 행사 준비, 생활 지도 등으로
법정 근무시간을 훨씬 초과하는 업무가
일상화되어 있다.
정신적 과로와 자살
과로사는 신체적 사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극한의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 정신질환,
그리고 자살도 중요한 문제다.
'가로시(過労死)' 외에 '가로지사츠(過労自殺)'라는
새로운 용어까지 만들어졌다.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장애가 원인이 된
자살을 가리킨다.
직장 내 괴롭힘, 과도한 성과 압박,
인사 이동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진다.
특히 일본의 '완벽주의' 문화에서
업무상 실수나 실패에 대한 책임감이
과도하게 개인화되는 것도 문제다.
-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장애 인정 건수: 연간 600건 내외
- 그 중 자살·자살시도: 약 200건
- 20-30대 비율: 전체의 40%
- 여성 비율 증가 추세: 2010년 27% → 2020년 35%
'워크 라이프 밸런스' 정책의 한계
2000년대 들어 일본 정부는 적극적인
'일·생활 균형'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 프리미엄 프라이데이 (2017년)
매월 마지막 금요일 오후 3시 조기 퇴근을
장려하는 캠페인이었다.
하지만 실제 참여율은 10% 내외에 머물렀고,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책으로 평가된다.
- 잔업 시간 상한제 (2019년)
월 45시간, 연 360시간 잔업 시간 상한을 법제화했다.
위반 시 형사처벌까지 가능하게 했지만,
여전히 많은 기업에서 '서비스 잔업'이나
'연장근무 분산' 등의 편법을 사용한다.
- 텔레워크 확산
코로나19를 계기로 재택근무가 확산되었지만,
이것이 반드시 근로시간 단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집에서 더 오랜 시간 일하게 되는
역효과도 나타났다.
기업의 대응과 한계, 대기업의 변화 시도
도요타, 파나소닉 등 대기업들은
'일하는 방식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정시 퇴근 장려, 유연근무제 도입,
휴가 사용 의무화 등의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주로 본사 정규직에게만
적용되고, 협력업체나 비정규직에게는
여전히 기존 방식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중소기업의 현실
중소기업에서는 인력 부족과 비용 문제로
근본적 개선이 어려운 상황이다.
대기업으로부터의 납기 압박,
인력 대체 불가능성 등으로
장시간 노동 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생산성의 역설
흥미롭게도 장시간 노동이 만연한 일본의
생산성은 OECD 국가 중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2022년 기준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OECD 평균의 78% 수준이다.
이는 '오래 일한다고 성과가 비례해서 늘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피로 누적으로 인한 집중력 저하,
창의성 부족, 실수 증가 등이
오히려 전체적인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선진국들이 근로시간을 줄이면서도
생산성을 높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 일본 연간 근로시간: 1,598시간 (OECD 24위)
- 시간당 노동생산성: $40.7 (OECD 27위)
- 독일 비교: 근로시간 25% 적지만 생산성 40% 높음
- 정신건강 관련 의료비: 연간 4조 엔
세대별 인식 차이
- 베이비붐 세대 (1946-1964년생)
"회사를 위한 희생은 당연하다"는 가치관을 가진 세대.
과로를 '성실함의 증거'로 여기며,
젊은 세대의 '워라밸' 추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X세대 (1965-1980년생)
버블 붕괴와 구조조정을 경험한 세대.
직장 안정성에 대한 불안으로
여전히 장시간 근로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 밀레니얼 세대 (1981년 이후 출생)
개인의 삶을 중시하며 과로 문화에 저항하는 세대.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경제적 압박과
회사 문화의 압력으로 타협하는 경우가 많다.
과로사 유족들의 투쟁
과로사 문제가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데는
유족들의 끈질긴 투쟁이 큰 역할을 했다.
1988년 설립된 '전국 과로사를 생각하는 가족 모임'은
과로사 인정 기준 완화, 예방책 마련,
기업 책임 강화 등을 요구해왔다.
2014년에는 '과로사 등 방지 대책 추진법'이
제정되어 매년 11월을 '과로사 예방 계승월'로
지정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과로사 인정 기준은 까다롭고,
기업의 책임을 묻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의 과로 문화
한국의 상황은 일본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OECD 국가 중 근로시간 상위권에 위치하며,
'칼퇴근'이 특별한 용어로 사용될 정도로
장시간 근로가 일상화되어 있다.
야근과 주말 근무가 성실함의 지표로
여겨지는 문화는 일본과 매우 유사하다.
'회식 문화', '눈치 문화' 등
추가적인 사회적 압박 요소도 존재한다.
2018년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사각지대가 많고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한국 연간 근로시간: 1,915시간 (OECD 3위)
- 과로사 의심 사망자: 연간 추정 1,000명 이상
- 직장인 스트레스 지수: OECD 평균의 2배
- '번아웃 증후군' 경험률: 전체 직장인의 76%
오늘의 교훈
과로사 문제는 단순히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 전체의 가치관과 시스템이
만들어낸 구조적 문제다.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고,
성실함이라는 미명 하에 자기 파괴적 행동을
강요하는 사회의 모순을 보여준다.
진정한 해결책은 개인의 각성이나
기업의 선의에만 의존할 수 없다.
사회 전체가 '인간 중심'의 가치관으로
전환해야 한다.
일의 목적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지,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회사의 성공도 구성원들의 행복과
건강한 삶이 전제되어야 의미가 있다.
한국 사회도 같은 함정에 빠져 있다.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배워
더 늦기 전에 근본적인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과로사는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사회의 실패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다음 화 예고
12화에서는 혼인 기피와 저출산 – 가족 제도의 구조적 붕괴를 다룹니다.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일본 사회의 현상을 통해
전통적 가족 제도의 변화와 그 사회적 파급효과,
그리고 한국이 직면한 유사한 도전을 살펴봅니다.
[일본 : 잃어버린 미래가 남긴 구조적 경고]
2부 11화. 일 때문에 죽는 사회 – 효율성 신화가 만든 자기파괴적 구조
(이 글은 일본 후생노동성 2024년 과로사 백서, 내각부 2025년 업무개선 정책, 보건복지부 2024년 산업안전 보고서, 고용노동부 2024년 근로환경 실태조사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