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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선 Oct 04. 2020

예술의 순간들

내게 머물렀던 뜨겁고 차가운 예술을 꺼내다.







양혜규, 사동 30번지 설치작품 





많은 사람들이 예술이 일상의 반대편에 있다고 믿는다. 예술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의 영역이며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내적 환기와 마르지 않는 영감, 에너지와 추동력을 예술에서 찾기도 한다. 일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예술로 치유하려는 활동도 있다. 


그러나 정작 예술을 만나는 자리는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다. 대화하고 위로받으라지만 미술관에 걸린 작품들과 어떻게 대화해야할지 어떻게 위로를 느껴야할지 막막하다. 예술의 방식은 철저히 낯설어 쉽게 곁을 주지 않으며 카탈로그에 적힌 언어들은 높은 장벽을 느끼게 한다. 시대마다 예술이 담아온 주제가 얼마나 다양했던가? 역사를 알고 예술가를 알고 예술의 방식까지 알아야 표현된 예술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액자 속에 담긴 그림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나 강가를 덮은 아스라한 물안개, 계절의 여신이 깃들인 듯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과 깊은 사색에 빠진 여인, 고양이와 장난치는 소년 앞에서 깊은 곳으로부터 밀려오는 감정을 물리치기가 어렵다. 그 순간, 예술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보편적인 공감의 장소를 만들고 우리는 예술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그때의 예술은 알아야할 모든 미술사적 지식과 배워야할 모든 예술의 방식을 떠나서 존재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과 예술이 만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두는 것뿐이다. 


예술은 내 안의 모든 것과 만나야 의미가 생긴다. 오래전 대학 초년 시절, 교양 철학 과제를 하면서 접한 유홍준 선생의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그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문장은 미숙한 예술애호가인 내게 강렬한 선언으로 다가왔다. 아는 것보다, 보이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먼저다. 


그러니까 예술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 나는 특정한 장면, 특정한 선율, 특정한 단어에 자주 빠져들었고, 녹색 이끼가 낀 그늘진 모퉁이, 낡은 건축물과 빛바랜 사물, 어딘지 모를 곳으로 흐르는 물길과 조용히 조응하는 빛의 향연 같은 장면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림은 액자 바깥으로 이어져 나를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가곤 했다. 어렸을 적엔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로 이끌었고, 조금 커서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로 솟아올랐으며, 이윽고 보르헤스의 미로와 오솔길을 맴돌게 했다. 


내가 사랑하는 장면을 더 보고 싶어서 미술관에 갔다. 수많은 그림을 보았지만, 끝끝내 내가 빠져드는 그림은 어린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그 장면들과 닿아있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미의식은 과거 어느 순간에 이미 완성되고 이후엔 끝없이 그것을 찾아다닐 뿐인지도 모른다. 


예술이 만든 장소들


미술관은 ‘길 잃기’에 최적의 장소다. 미술관은 오리무중의 미로이며, 우연히 만난 작품 하나가 인생의 방향을 바꿔버리는 곳이다. 그러니, 우연에 매혹되고 불특정한 만남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미술관에 가야한다. 그림은 내면의 깊은 곳에 마법의 장소를 창조한다. 


그런데 나는 그림이 걸려있는 공간에서 장소의 마법을 체험할 때가 많다. 미술관은 비일상적인 건축이다. 광활한 기하학적 공간은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주고, 찬란한 빛의 기둥과 점진적인 어둠이 공존하며 감각을 고양시킨다. 미술관이 종교적인 성소처럼 느껴진다고도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보통 미술관은 화이트큐브라 불리는 무미의 흰색 사각 공간인 경우가 많지만, 미술관으로 계획되지 않은 다양한 건물들이 - 공장, 창고, 여관, 주택 - 예술작품의 전시공간이 된다. 폐공장을 개조한 뉴욕 ‘디아비콘 갤러리’, 2차대전 중 세워진 나치 벙커를 개조한 베를린의 ‘보로스 미술관’, 폐소각장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바꾼 부천 ‘아트벙커39’처럼 말이다. 


장소의 힘이 강하면 그림을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림 보는 것을 방해한다. 이런 공간은 공간 자체가 작품으로서 성격을 가진다. 강렬한 자기 서사가 있는 노련한 작가가 아니고서야 건축의 강렬한 언어들을 감당하지 못한다. 


일상의 장소가 예술의 장소로 전환되기도 하는데, 설치미술가인 양혜규의 ‘사동 30번지’ 프로젝트가 잘 보여준다. 인천의 한 퇴락한 집으로 초대된 관람객들은 직접 대문을 열고 들어와 집의 곳곳에서 일상의 사물들이 예상치 못한 상태로 놓여있는 것을 보게 된다. 


관람객들은 반짝이는 조형물, 방안에 덩그렇게 놓인 세탁기, 거꾸로 가는 시계 같은 사물들을 발견하지만, 집이라는 장소를 체험하면서 더욱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관객은 자신이 경험한 할머니댁의 기억을 꺼내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리움, 낡음, 사라짐의 이야기를 확장했다. 예술을 통과한 개인들은 저마다 무수한 서사의 장소를 만들고, 예술의 순간은 그들의 삶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가 된다.  






존 싱어 사전트,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 


삶 속의 예술, 삶이라는 예술 


예술이 인생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한 장의 그림에 매혹되었다. 존 싱어 사전트의 몽환적인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를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 보았던 그날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림은 밀려오는 어둠 속에서 흰옷을 입은 소녀 둘이 종이등에 불을 켜는 장면이다. 초여름 저녁의 고요하고 따스한 온기가 퍼진다. 불빛 때문일까, 시들어가는 꽃들이 생기를 얻고 누그러진 삶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소녀의 구두 아래 쓸린 풀들, 흰색 치마에 와락 달려드는 시든 꽃잎이 불빛 아래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저녁의 푸른 색조는 신비로운 활기로 가득하다. 


아름다운 그림이었고 평생 간직될 순간이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림을 들여다보며 조금씩 그림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냈다. 이번에는 주홍빛 불빛을 집중해서 보게 되었고 화가가 예술에 대해 느끼는 환희의 본질을 더듬어보았다. 순간순간 몰두하고 집중하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짧은 순간의 환희를 담아낸 화가의 집념이 만져질 듯했다. 


엄정하고 찬란한 자연이 무한에 가까운 흐름으로 삶과 죽음의 과정을 순환하는데, 볼이 빨간 소녀들은 자기만의 시간에 푹 빠진 채로 조심스럽게 등불에 몰두한다. 그것은 예술의 본질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태도가 아닐까? 한편, 순진하고 무목적의 맑은 정신으로 어둠을 밝히는 존재는 인생을 고귀하게 매만지고 싶은 우리 모두에 해당될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삶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 인생도 예술도 종이등의 불꽃처럼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집스럽게 몰두해야 하는 것이므로. 예술은 시대와 조응하는 황홀한 선택이며 시대에 저항하는 불온한 정신이다. 예술은 암시로 속삭이는 인생의 다큐멘터리며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인생의 고귀함과 숭고함을 느끼는 그 시간이 예술의 순간들이 아닐까? 인생의 순간들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매 순간 숭고한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그것을 말하지 않는 예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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