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과 관 사이, 취향과 태도의 결
고요하고 투명한 식물의 호흡
‘식물관PH’는 도심 가까이에 자리 잡은 온실이다. 전면이 유리로 된 건물 속으로 푸른 잎사귀들이
보인다. 돌로 된 손잡이를 밀고 들어가면 가림막이나 벽이 없는 그야말로 탁 트인 공간을 만난다.
손 안에 따뜻하게 닿았던 매끄러운 질감을 잊기도 전에 상쾌하고 푸른 기운이 밀려든다.
유리 천장이 훌쩍 높아 자연광이 사방에서 비춰드는 가운데, 시선이 닿는 곳마다 초록이 가득하다.
5미터가 넘는 아레카야자와 대왕유카, 커다란 잎사귀를 내려뜨린 몬스테라, 흰색의 띠가 잎사귀를
두른 드라세나 등이 너울거리며 숲을 이룬다. 다시 보니 땅에 심은 것이 아니라 커다란 스틸 화분에
담겨 적당한 거리를 두고 놓여있다. 그 사이를 길 삼아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식물과 접촉한다.
친숙한 관엽수들이건만 원래 제 키대로 자란 모습을 보니 새로운 생명체인 것만 같다.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가면 선인장류들이 기다린다. 동글동글한 볼륨 속에 꽉 채워진 초록의 싱그러움이
풍선처럼 날아와 부딪힌다.
이 공간이 초록으로 물들어있는 이유는 다른 색채를 배제한 과감한 건축 덕분이다. 절제된 디자인은
초록에 집중하게 한다. 철골조와 유리, 콘크리트와 스테인리스 스틸이라는 무채색 계열의 도시적인
감각의 재료들을 썼다. 카페를 겸한 온실은, 전시실, 아트숍, 사무실은 보이지 않는 층에 숨겨둔 새하얀 콘크리트 입방체와 연결된다. 테이블과 의자도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이며, 심지어 쟁반도 스틸 제품을 썼다. 목질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식물들이 있기 좋은 곳이다.
식물관PH는 다채로운 식물을 만나는 식물원과 다르다. 식물원이 생태계의 다종다양함을 배우는
장소라면, 식물관PH는 식물의 시간에 동참하며 심미적인 체험을 하는 곳이다. 식물의 시간은 고요하고 느리다. 복잡한 세계를 떠나 잠시 마음을 내려놓을 곳을 찾는 사람에게는 식물이 열어주는 고요한
그늘이 무척 반가울 것이다.
식물, 무형한 공간에 형상을 그리다
관엽수와 선인장의 진한 초록의 에너지를 느낀 뒤에는 온실 속에 마련된 작은 온실로 들어가보자.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공간이지만 유리문을 통과하는 순간 다른 세계에 온 듯 온도와 습도가 높아진다. 황금사철나무, 준베리, 팥배나무, 붓순나무, 틸란드시아와 아기자기한 다육식물들이 투명한 선반에 놓여있다. 마치 갤러리에 전시된 예술작품 같다.
투명한 캔버스에 선과 면을 그렸다고 할까, 여백이 있는 공간에 놓인 조각과 같다 할까. 조그만
이름표를 달고 있는 각양각색의 분재들은 제 나름의 조형미를 펼치며 자기만의 공간에 뚜렷한 색채를 부여한다. 꽃이 없어도 잎사귀가 참 곱고, 잎사귀가 떨어지면 가지가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모든
식물에게는 미학은 존재한다. 빈 화분과 물조리개가 화분 사이에 무심히 놓여 있는데 그조차도
일관된 구성에 변형을 가하는 파격처럼 느껴진다.
1920년대를 살았던 예술평론가 노월 임장화는 ‘식물의 예술미론’이라는 글에서 식물의 관능적인
조형미를 설파한 적이 있다. 식물 속에는 무한한 대(大)공간을 향해 올라가고자 하는 집념이 있다고
말한 그는 식물이 퍼트리는 가지가 그리는 정형화되지 않은 아름다움의 세계를 ‘추상의 영역에서
운율적 활동’이라고 표현했다.
그러고 보면 식물들은 태생적으로 예술을 하는 존재들이다. 예술의 대가가 되어야 가능한 완전한 조화의 세계를 식물들은 이미 내재된 습관과 행동패턴으로 보여준다. 미완성인 어린 식물들조차 조화로운 형태들을 스스로 만든다.
식물관PH의 식물에게서 추상화의 감각을 엿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백을 이해하는 선, 절제된 색, 미묘한 기운의 흐름. 모두 다른 식물들이지만 하나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식물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이 작은 줄기와 잎 속에서, 그리고 단단한 흙 속에 박힌 뿌리 속에서 얼마만한 힘들이 싸우고 있을까? 생의 격렬함이 소리 없이 가지와 잎으로 뻗어 나오고 단단해진 껍질로 승화된다. 식물을 바라보며 시를 만들고 예술을 논했던 옛 사람들의 감각에 새삼 공감하게 된다.
식물과 함께 쉬는 좋은 그늘
‘식물과 사람이 함께 쉬며 고유의 경험을 하는 공간’. 식물관PH에 붙어있는 설명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식물들은 배움의 대상이 아니다. 낯선 식물들의 색다른 생태에 놀라지 않아도 된다. 식물은
스스로 아름다운 존재로서 사람들의 감각을 일깨운다. 곁에서 쉬고 서로를 배려하며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대상으로서의 식물. 도시인이 추구하는 식물 관람은 이런 스타일이 아닐까?
식물의 곁에서 잠시 쉬면서 다과를 즐겨도 좋지만, 3층에 마련된 전시실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나무가 우거진 언덕을 향해 활짝 열린 창을 가진 전시실에는 식물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감흥을 조금
더 상승시킬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공간과 어울리도록 잘 기획된 전시회는 감각을 확장해준다.
마지막으로 야외 정원으로 나가보자. 작은 콘크리트 공간에 이끼와 작은 나무가 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일본식 정원을 떠올리게 한다. 내부에서 둥근 창으로 바라보며 감상할 수도 있다.
거닐기보다 바라보는 정원이며, 시선의 움직임을 멈추고 쉬어가는 공간이다.
창가, 계단 옆... 보이지 않는 곳에도 크고 작은 식물들이 고요히 흔들리고 있다. 우연히 발견한
식물들로부터 얻은 기쁨은 열렬하지 않지만 오랫동안 서늘하게 지속된다. 쉼과 숨, 글자가 서로 닮아서인지 쉼 속에는 숨을 쉬는 행위도 담긴 것 같다. 깊은 호흡을 하는 일이 진정한 쉼이 아닐까?
편안한 호흡이 가능한 후엔 감각이 깨어나고 다른 세계로 나아갈 열정도 채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식물은 쉼의 순간을 지켜줄 존재들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