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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Dec 31. 2018

2018 홍진아 어워즈

올 해 나와 함께 해준 고마운 순간들

벌써 12월 31일이라니. 여러모로 지치기도 하고, 또 '내가 올 해 뭘 이뤘지'라는 생각에 빠져 한 해 정리를 하고 싶지 않은 연말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리를 해도 한 해는 가고, 정리를 안해도 한 해가 간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내년을 위해서 올 한해를 좀 정리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글은 내가 가장 많이 읽을텐데(나는 잠 안올 때 브런치에 내가 써놓은 글들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내년 어느날 잠 안오는 나를 위해서라도.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리고 20대 중반을 지나며 매년 해왔던 일이잖아? 그리고 이룬 게 왜 없어 왜, 생각해보면 다 있지, 라는 마음으로 시작해본다.


0. 총평 : 격변의 시기는 언제쯤 맞이하지 않을 수 있나요?


작년엔 N잡 실험을 했다. 일 환경을 바꾸고, 거기 적응하느라 상반기를 다 보내고, 적응이 된 다음에는 N잡을 하며 고민하게 된 새로운 문제들을 정리하고 알리고, 또 일하면서 하반기를 금방 보냈다. 작년에 홍진아 어워즈를 할 때는 2017년 한 해가 큰 변화의 시기라고 생각했다. 늘 인생은 변하지만 N잡 하는 것보다 더 변화를 맞이할 수 있나 싶었던 것이지. 하지만 또 격변...원래 격변은 20대 때 막 경험하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튼, 올 해 나는 두 개의 회사에 소속을 두고 일하는 N잡 실험을 마무리했고, 소속 없이 프리랜서 형태로 일하며 내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선샤인콜렉티브'라는 커뮤니티 랩을 창업했다. 2015년에 시작한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와 2017년에 시작한 외롭지 않은 기획자학교를 하면서 내 기획과 프로젝트를 사업화 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9월 1일 내 마음대로 창업을 했다. 이직과 창업은 장르가 다른 게 아니라 산업 자체가 다른 것이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말했지만 그걸 왜 경험해야 아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일은 하기 어려워하는 내게 창업은 잠이 안오는 고민을 하게 했다.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한거야? 스스로에게 묻던 늦가을부터 오늘까지, 나는 계속 이게 될까를 의심하며 어떻게 되게 할지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된거 잘해봐야지 뭐, 이게 항상 결론.


어쨌든 이런 격변의 시기를 지나며 나와 함께 해준 것들을 기록해본다.


1. 올해의 떡볶이 : 환공어묵 마늘즉떡

합정 교보문고 근처에 있는 환공어묵의 마늘즉떡. 적당히 달고, 좋은 어묵을 써서 그런지 국물이 맛있다. 또 마늘을 많이 넣어주기 때문에 MSG맛이 많이 안나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다는 착각이 들 정도. 쌀떡을 써서 그런지 포장마차 떡볶이와 일반 즉석 떡볶이 사이의 맛이 난다. 그래봤자 탄수화물 폭탄이고 탄수화물은 원래 맛있지만, 또 떡볶이집마다의 맛의 차이를 느껴보면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 수 있다. 나는 쫄면 사리를 추가 한 뒤에 볶음밥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합정 근처에서 밥을 먹을 일이 있고, 같이 밥 먹는 사람이 떡볶이를 좋아한다면 환공어묵으로 가시길 추천!


2. 올해의 커피 : 도렐의 너티클라우드

성수 도렐의 너티클라우드

3월에 도렐에서 너티클라우드를 마시다가 아모레퍼시픽 후원 결정 전화를 받았다. 5월에 책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미팅을 하러 용산에 왔다가 너티클라우드를 마셨다. 축하할 일이 있는 친구를 기다리면서도, 너무 더워서 기절할 것 같던 여름 날에도, 섭외 하고 싶어 몇 번 메일을 보냈던 강사분과의 미팅에서도 도렐의 너티클라우드를 마셨다. 도렐 육지점이 용산에 생겼기 때문이고, 또 성수에도 생긴 덕이다. 올해 나의 어떤 순간을 함께 해준 커피. 사실 맛있는 커피는 많았고, 커피는 늘 일하면서 마셨던 탓에 일하던 순간순간이 생각난다. 내년에도 맛있는 커피 많이 마시면서 일 열심히 해야지.


3. 올해의 빵 : 이걸 하나를 고를 수가 있어?

빵 사진 찍기 전에 먼저 먹어서 빵사진이 몇 없다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계산해보지 않았지만 올해 밥보다 빵을 더 많이 먹은 것 같다. 밥은 건너 뛰어도 빵은 건너뛰지 않았으므로...그중에 맛있었던 것을 굳이 고르자면, 진저티사무실 근처 빵집(상호모름)의 토마토크림 쁘레첼, 4월의 물고기의 케이크와 까눌레, 유정이가 맨날 사다주는 성북동 빵집(상호모름)의 스콘, 아우어베이커리의 홍차파운드, 우스블랑의 감자빵(정확한 이름 모름), 공공칠빵(이름이 이렇지만 정말 맛있는 빵만 판다)의 무화과깜빠뉴, 빵선생(이곳도 이름이 이렇지만 빵이 맛있다)의 초코크로와상 등등을 얘기할 수 있다. 빵은 커피와 함께 일-에너지원이 되어주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 끊겠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아. 내년에도 빵을 먹기 위해 돈을 벌어보겠다.

 

4. 올해의 음식 : 마라샹궈

뉴욕에서도 샹구는 삶

2017년의 음식이 마라탕이라면 올해의 음식은 마라샹궈라고 할 수 있다. 일년 내내 마라샹궈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 먹었고, 이걸 먹기 위해 친구들과 만나기도 했다. 뉴욕에 갔을 때, 캐나다에서 유학 중인 동생들에게 마라샹궈의 맛을 전파하고 싶어서 '마라프로젝트'라는 집을 찾아서 마라샹궈를 먹었고, 다음날 테이크아웃해서 한 번 더 먹었다...음? 왜 마라탕과 마라샹궈는 이렇게 맛있고 계속 먹고 싶을까 의문이 좀 있었는데, 마라탕 속에 들어가는 앵속각이라는 성분이 마약 비슷한 성분이라 계속 먹고 싶은 것이라는 얘길 보았다. 아?


5. 올해의 책


올해는 책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인 9월까지 독서를 열심히 하고, 10월부터는 많이 읽지 못했다. 소설보다 비소설을 많이 읽었고, 잘 읽지 않던 자서전도 읽었다. 페미니즘 서적도 작년이나 재작년보다 더 많이 읽었던 한 해.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나왔느냐(또는 그 시기에 관심있는 작가가 누구냐)가 독서리스트에 영향을 많이 미쳤었는데, 올해는 지금 내 관심사(일, 창업, 여성)에 맞춰 책을 읽었던 한 해.


올해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베이스로 해서 해외 블로그나 매체를 많이 보고 거기서 정보를 많이 얻었다. 내년엔 '올해의 책'이 아니라 '올해의 문장'이나 '올해의 글(?)'로 항목을 변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설 :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작가가 2010년부터 2018년 여름까지 쓴 단편소설을 모은 책. '알다시피, 은열'이 제일 좋았다. 내가 여성으로서 여성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기 전부터, 누군가는 이렇게 다양한 여성들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는 것에 위로를 받으며 덮은 책. 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도 좋았다. 김진영의 <마당이 있는 집>은 잡자마자 끝까지 읽어내려간 책. 그러고보니 올해는 여성소설가들의 소설만 읽었다. 내년에도 다양한 세계를 만들어 내는 여성 소설가들의 소설을 많이 읽고 싶다.


비소설 : 필 나이트 <슈독>, 제현주 <일하는 마음>, 헤이메이트 <둘이 같이 프리랜서>

사실 <슈독>은 달리기를 한창 할 때 읽어서 좋았다. 책을 읽는 경험이 좀 다채로웠달까. 그래서 기억에 남는 책. 가을이 시작될 무렵에 읽기 시작했는데, 마침 올해 가장 열심히 달리던 때라 책 속에 나오는 필 나이트의 달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볼 수 있었다. 일본과의 협상에 실패하거나, 동부에 새로운 밴더가 생기거나, 대출을 받아야 할 때 필나이트가 달리기를 선택했다는 것이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켰고(물론, 읽을 때는 저런 어려움을 그냥 머릿 속으로만 상상하던 때였..) 그래서 달리기도 책읽기도 재밌었다..? 나이키러닝앱 서비스기획자 만나보고 싶다는 얘기를 작년부터 계속 하고 있는데, 나이키라는 브랜드가 가진 역사가 그렇게 서비스기획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는 2016년 올해의 책이다. 2년이 지나 저자의 새 책이 나왔고, 2016년에는 알지도 못했었는데 새 책에서 다수 출연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처음 만난 분에게 나를 어떻게 알고 연락을 했냐니까 "'일하는 마음'에 나오셔서 찾아봤다"는 말도 들었다. 내가 이 책을 꼽은 이유는 이것 때문은 아니다. 조바심만 내다가 겨울이 시작될 무렵 안해 본 일을 하기 위해 한 발 내딛을 때, 이 책에 나오는 문장들이 내가 용기를 낼 수 있게 했다. "선택은 가볍게 하고 오늘은 단단하게 살려고 한다. 역시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일상뿐이다."라는 문장은 12월 내내, 성경구절 외우는 것처럼 되뇌이며 출근한 문장이기도 하다.


올해 가장 재밌었던(=웃겼던) 책을 또 한 권 뽑자면, 헤이메이트의 <둘이 같이 프리랜서>였지. 읽다가 소리내며 웃은 책이랄까. 기승전결 있는 에세이집이라니, 이들 말고 또 누가 쓸 수 있죠? 더 많은 일 이야기가, 우리세대가 경험한 일의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고 만날 때마다 얘기하는데, 그걸 얘기로 끝내지 않고 이렇게 잘 해냈다는 것도 좋았다.


6. 올해의 드라마 : 그레이스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그레이스가 살인자인지 아닌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며 시작한 드라마는 막판에 가서는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레이스가 만드는 세계와 그 안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신, 그리고 결론을 내리는 것을 누구에게도 위탁하지 않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 <빌어먹을 세상 따위>도 좋았고, <친애하는 백인 여러분> 시즌2도 재밌게 봤다. 요즘은 <스카이캐슬>을 제시간에 보기 위해 금토에 집에 뛰어가는 삶 살고 있다.


7. 올해의 넷플릭스 : 앨리웡의 스탠드업 코미디들

올해는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장르를 알게 되고(스탠드업 코미디쇼를 기획하면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기 시작한 사람...), 넷플릭스에서 찾아봤다. 내 주변에 스탠드업 코미디쇼로 논문 내도 되는 윤이나의 영향이기도 하고, 또 정치팡인으로서 결국 정치/사회풍자가 주요 소재가 되는 스탠드업 코미디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처음 본 스탠드업 코미디쇼는 앨리웡의 <베이비코브라>였고, 그래서 앨리웡이 나의 기준점이 되어버렸다. 하나의 작품으로서 박수 치는 쇼는 해나개즈비의 <나의 이야기>. 요즘 즐겁게 보고 있는 쇼는 일주일 전 추천 받고 정주행한 하산 미나즈의 <이런 액션>. 세상엔 재밌는 게 너무 많아. 내년에는 보는만큼 잘 만드는 기획자가 되어보겠다!


8. 올해의 영화 : 레이디버드

너무 좋은데 왜 좋냐고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영화. 그냥 시얼샤로넌이 좋고, 그레타거윅이 좋고, 영화의 색깔이 좋고, 영화 속 인물들이 좋고, 결국 자기를 연민하지 않고 자신과 살아가게 된 레이디버드의 이야기가 좋다. 내년에도 여성이 만든 좋은 이야기들을 관객으로 영화관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9. 올해의 기획 : 래프라우더

금커튼 사랑해요

올 봄엔 내가 하고 싶은게 뭔지 좀 더 확실해진 사건들이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왜안돼 페스티벌>에서 시작해서 <래프 라우더>에서 마무리된 행사 기획. 가장 잘 뛰어놀 수 있는 플레이어를 섭외해 놀 수 있는 판을 만드는 일이 내가 가장 잘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특히 <래프 라우더>는 해보지 않은 일을 해봤고,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는 것에서 올해의 기획. 표가 잘 팔릴 줄은 알았지만 12시간만에 다 팔릴 줄은 몰랐지. 좀 더 제대로 기획해서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


10. 올해의 카드값 : 뉴욕행 비행기표

브루클린 브릿지 건너기 전 신난 모습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좀 더 제대로 해보자 싶어서 회사를 정리했다. 그리고 뉴욕에 가기로 했다. 정말 충동구매였는데, 올 해 내가 가장 잘한 충동구매. 뉴욕에 간 게 4월 1일인데, 티켓을 3월 20일에 구입했다. 열흘 동안 일하면서 숙소만 정하고 후다닥 한국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뉴욕으로 갔다. 2주 간 뉴욕에 머물면서 많은 것을 봤다. 지저분하고 추웠지만(4월이었는데 폭설이 내린 점), 끝도 없이 이어진 길을 계속 걸어도 되는 도시여서 좋았다. 재미있는 일이 매일 일어나고, 내게 다양한 것들을 매일 보여주는 도시여서. The Wing에도 가고, New Women Space에도 가고, Refinery29 편집장이 참여하는 포럼에도 갔다. 다녀와서 하고 있는 일, 하게 된 생각엔 뉴욕 여행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매년 2주 정도 뉴욕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11. 올해의 운동 : 불황에는 달리기가!

올해의 130

불황에는 달리기인구가 늘어난다고 한다. 아무런 장비가 필요없이, 달릴 곳만 있다면 운동화를 신고 뛰면 되는 운동. 올해 나의 가계사정이 불황기를 지났기 때문에 돈 드는 운동 대신 열심히 달렸다.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다행인 한해였다. 3-4km를 달리는 것으로, 왔다갔다 하는 시간까지 합쳐 한 시간 정도를 쓸 수 있을 정도로 달리기 하는 것이 스스로 정한 룰이었고, 4km 기록을 점점 단축하는 재미를 느끼며 달렸다. 내년엔 150km를 달려야지. 근육운동도 함께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 좋겠다.


12. 올해의 10KM : 경주 국제마라톤

웃고 있지만 이후 한시간 넘게 차를 못잡을 줄은 몰랐어

올해는 10km 마라톤에 두 번 나갔다. 작년에 두 번 나가는 것이 목표라고 적어두었는데 목표 달성한 셈. 원정달리기단이 된 범서파 친구들 덕분에 경주에 가서 달리기를 했다네. 각자 할 수 있는만큼, 각자의 속도로 달릴 수 있어서 좋았다. 대릉원 사이를 달리던 순간이 제일 좋았고, 마이런의 디제잉 대신 사물놀이가 곳곳에서 흥을 내게 해준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달리기 전에 원정마라톤을 온 우리들에 취해서 '내년엔 하프를 나가자'고 막 설득했지만 달리고 3km를 지나며 결승선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제일 먼저 하프 나가자고 했던 말을 취소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2019년에는 봄에 두 번, 가을에 두 번, 이렇게 네 번 10km를 뛰는 것이 목표다. 10km 마라톤은 도심 엔터테인먼트니까...? 나이키 위민즈런 피케팅에 성공하고 싶다는 작은 희망도 가져본다.

 

13. 올해의 카카오페이 : 윤이나의 엔젤투자

윤이나의 ‘할 수 있다’ 시리즈 중 하나

아침에 대출 가능여부를 알아보러 은행에 들렀던 날이었다. 자기 몫의 집도 절도 없는 30대 중반의 여성에게 대출 상담이라는 것은 부담이 되고 좀 쫄리는 일이고, 여러가지 부담을 왕창 안고 은행을 나와 내내 가라앉아 있었다. 사무실 문을 닫고 집에 오는데 갑자기 카카오톡이 왔고, 윤이나가 '엔젤투자'라며 돈을 보냈다. 나는 갑자기 을지로3가역의 사연녀가 되어 눈물콧물을 흘리며 온갖 물건을 다 파는 지하도를 걸었다. 사실 격언과 느끼한 말들을 싫어하는 윤이나가 '할 수 있다!'를 외칠 때마다 너무 안어울리지만 고마워서 웃으며 콧물을 흘린다.

안하던 일을 하고, 변화를 맞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살피는 친구들에게 많은 빚을 진 한 해였다. 성격이 급해서 '아 이건 아닌가봐'를 쉽게 생각하는 내가 다시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기획자학교로 만나서 이제는 온갖 아이디어 공유를 하는 동료가 된 권해솜도, 올해 3월까지 우리 대표님이었던 서현선님도 필요한데 쓰라며 엔젤투자를 해주었다. 고마운 마음을 꼭 기록하고 싶어, 여기에 남긴다.


14. 올해의 자매애 : 한와담에서 소고기 먹던 범서파

“저 책 계약하기로 했어요.”

어쩐지 말하기 쑥스러워 그냥 앉아있는 내 옆구리를 진이 찔렀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던진 말에 같이 있던  범서파 멤버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축하해주었다. 좀 놀랐고, 그런데 열심히 고기를 굽던 중이었고, 이어지는 축하를 받으며 다시 고기를 먹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캄캄하고 조용했기 때문인지, 축하해주던 소리와 표정이 천천히 떠올랐다. 나를 바라보던 눈들도. 자기 일이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기뻐해줄 수가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며 좀 울었다. 나에게 '자매애'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 중 하나는 이 순간이 되겠지. 여성이 여성들을 미워하도록 만들어진 세상에서, 미워하는 대신 더 기뻐하고 더 축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5. 올해의 휴가 : 갑작스럽게 떠난 대관령

지난 5월부터 디엣지레터라는 우리만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 5월 10일 첫 메일을 시작으로 12월 31일 현재 82번째의 메일이 뉴스레터로 발행되었다. 2018년의 5월 이후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건 내가 보내고 받은 디엣지레터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해야할 말이 생각나면, 그게 카톡으로 한번에 정리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 랩탑을 열고 내 마음을 곱씹으며 메일을 보냈다.

대관령에 가게 된 것은 굉장히 갑작스럽게 진행된 일이었다.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현주님이 휴가라 대관령집에 내려가겠다고 했고, 가겠다는 얘기를 한 명씩 하다가 모두 대관령에 가게 되었다. 갑작스러웠지만 막상 만나니 예정되어 있던 계획이었던 것처럼 2박 3일을 같이 자고 먹고 걸었다. 각자 가장 편한 곳에 앉아서 일도 하고. 여름 휴가를 따로 갈 수 없었던 내게 진짜 여름 휴가였다. 고기를 한판 구워먹고, 별을 보며 새벽까지 얘기 나눴던,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서로 얘기하던 밤은 좀 신기한 밤이기도 했다. 신년에도 천천히, 계속해서 디엣지레터 쓰기. 아마도 엉킨 마음들이 많을 테니까.


16. 올해의 잘한 일 : 계속해 본 <외롭지 않은 기획자학교>

프로젝트를 1년 해본다는 것의 감각을 알려준 기획자학교. 하면 할수록 해보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아진다. 사이드프로젝트가 어떻게 내 자산이 되는지, 그리고 영향력을 어떻게 확인해나가는지 가르쳐준 프로젝트. 기획자학교를 통해 만난 주하님과 일터의 동료가 된 경험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일터 밖의 동료가 되기도 했다. 기획자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을 다른 일터와 연결해주기도, 기획자학교를 졸업했다는데 레퍼런스 체크를 해보고 싶다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외롭지 않은 교육기획자학교', '외롭지 않은 정치기획자학교', '외롭지 않은 기자이너(기획자+디자이너)학교' 같이, 기획을 바탕으로 일하는 20대 여성들에게 더 많은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싶다. 그리고 학교와 연결될 자원을 좀 더 적극적으로 찾는 2019년을 보내야지.


17. 올해의 집 : 우리집

여름에 이사를 했다. 내가 살았던 동네를 다 사랑하지만, 마포구청역에 있는 우리집 너무 좋다. 추운 것만 빼면...음? '우리동네'라는 감각을 주기도 하고, 외롭지 않게 해주는 친구와 밤 늦게까지 사는 얘기, 일 얘기를 할 수도 있는 곳이라 더 좋다. 적당한 때에 이사를 했다는 생각도. 아마도 이사를 하지 않았다면 창업이든 책 작업이든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것 같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지원사업을 받지 않기로 결정한 날, 나보다 더 속상해하며 "진아야, 더 큰 게 오려고 천천히 오고 있나보다"라고 얘기해 준 하우스메이트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뭔가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 내년엔 이웃사촌이 생기는 것이 목표다. 마포구청역 이사 계획 있으신 분들 제게 연락주세요...?


18. 올해의 식탁 : 만나면 여덟시간 정도.

지혜랑 같이 살게 된 이후 집에 손님들이 많이 오고 있는데 가장 많이 오는 사람들은 윤이나와 양유정. 우린 원래 일요일 저녁에 만나는 사람들이었는데 요즘엔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저녁쯤 만난다. 배달음식을 시켜먹은 뒤 컵을 2355개 꺼내놓고 마시는 모든 것을 마시는 만남. 그러다 중간에 영화도 보고, 유튜브로 온갖 노래를 들으며 각종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분명 좋아하는 남자연예인 얘기로 시작하는데 어느새 정치경제사회 얘기 하고 있는 점. 친구들과 함께 나이가 든다는 것의 의미를 가장 잘 알려주는 사람들이다. 분노를 정말 잘하고, 욕도 잘해줌...?


19. 올해의 귀여움 : 빌라선샤인 간판

여성들을 위한 커뮤니티 서비스 <빌라선샤인>을 시작했다. '간판이 켜지면 그 시간 동안 그 공간이 빌라선샤인'이라는 컨셉으로 여성들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고 여성들을 모아 연결하는 곳이다. 원래 만들려던 간판집 실장님이 급성간염에 걸리시는 바람에 3D프린터로 간판을 만들었다. 이정도까지는 예상하지 않았는데 예상을 뛰어넘은 귀여움이 되어버렸고, 이 간판과 함께 12월 내내 공간의 불을 밝히며 여성들을 만났다. 나를 가장 고민하게 하지만 가장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한 커뮤니티 서비스의 모양을 내년 한 해 동안 열심히 만들어 봐야지. 빌라선샤인이 없으면 이 간판도 필요가 없는데, 필요 없어지기엔 너무 아까운 귀여움 아닌지.


20. 올해의 마감 : <나는 오늘도 내가 만든 일터로 출근합니다>

올 해 처음 해본 경험은 내 이름으로 된 책이 나왔다는 것이다. 사실 올 해 봄에 <자비 없네 잡이 없어>라는 책에 공저자로 참여하긴 했지만, 한 권을 오롯이 내가 다 쓰는 경험은 이번 책 <나는 오늘도 내가 만든 일터로 출근합니다>로 해봤다. 기획자학교 준비 기간 + 빌라선샤인 준비 기간과 책을 내는 기간이 겹쳐서 새벽까지 글을 쓰고 정리해야 하는 날이 많았고, 그렇지 않은 날도 가슴 한켠에 책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잠들어야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자는 마음으로 불을 켜놓고 잠을 자던 10월...잊을 수 없다. 우여곡절이 많았고, 그래서 책을 내고 나서는 좀 지쳐버렸는데, 새해에는 새 마음으로 열심히 책을 팔아보겠다!!! 책은 잘 팔려야 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지...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0부터 원고를 쓰는 그런 일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잊지마라, 미래의 나여.


대상 : 나 데리고 잘 살아낸 홍진아

사실 대상은 올 한 해 나를 어르고 달래며 12월 31일까지 잘 살 수 있도록 해준 지인들에게 주고 싶다. 생각해보면 11월과 12월에 집중적으로 힘들었는데, 그 힘든 기간 동안 나와 한 두번 본 것이 전부인, 또는 얘기만 들어본 것이 전부인 사람들까지도 나를 도와주었다. 정보가 담긴 메일을 보내주고, 제일 먼저 입주민 등록을 해주고, 연결을 해주고, 또 "진아님,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주세요."라는 메시지를 전해주면서. 사람은 서로에게 빚지며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마음과 손길과 대화에 힘을 얻었다. 진짜 상 드리는 것도 아닌데 이런 말 하는 거 의미없지만 진짜 고마운데 어떡하지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홍진아어워즈는 나에게 대상 주려고 하는 어워즈 아닌가. 그러니 나에게 준다...? 한 해의 마지막까지 잘 지낸 나, 대상감이다. 원래는 30번까지 있었던 리스트를 은근히 하나씩 지우며 홍진아어워즈를 마친 것 역시 칭찬한다. 내년에도 나를 어르고 달래며 잘 살아내길. 올해보다 덜 주저하고, 좀 더 많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생했어!



안녕2018.

이제 2019년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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