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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태영 Jan 17. 2024

겨울을 기다리는 이유

 어렸을 때는 눈 내리는 겨울이 마냥 좋았다. 새벽부터 길 위로 눈이 소복소복 쌓이면, 일어나자마자 집 앞에 눈사람부터 만들어 놓고, 친구들을 불러 눈싸움을 했다. 눈싸움이 질리면 강둑으로 가서 포대나 종이박스를 깔고 앉아 눈썰매를 탔다. 그러다 얼어붙은 강물 위로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고, 처마 밑에 달린 고드름을 따서 칼싸움을 하기도 했다. 손발이 시리고, 코 끝과 두 볼이 빨개져서 기침이 나는 데도 질릴 때까지 놀았다. 그렇게 하루 신나게 놀고 나면 한동안은 감기약을 먹어야 했다. 그때는 염화칼슘을 길과 도로에 뿌리던 시절이 아니어서 겨울이 요즘보다는 조금 천천히 흘러갔다.

  한동안은 눈 내리던 게 정말 싫었던 적도 있었다. 최전방에서 군복무를 할 때는 눈 내리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새벽부터 넉가래와 빗자루를 들고 제설 작업을 했는데 치우면 또 내리고, 치우면 또 내리고 하는 바람에 며칠을 눈만 치운 적도 있었다. 제대하고 나서는 출퇴근 길에 내리는 눈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길은 미끄러웠고, 날씨가 더 추워지니 술 마시는 날만 늘었다. 나도 이렇게 늙어가나 보다 싶을 때쯤 카메라를 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사진을 매일 찍던 시절은 아니었다.

 사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잘 찍고 싶은 마음에 늘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내가 찍은 사진이 잘 찍은 사진인지 아닌지 궁금증이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사진집을 구입하게 되었다. 사진집을 통해 작가의 의도와 시선을 읽는 것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잘 찍은 사진을 보는 것은 매일 사진을 찍는 것만큼이나 도움이 되었다. 다양한 장면들 중에서도 유독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게 되는 사진들은 우산을 든 사람의 모습이었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날이 주는 분위기가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처음으로 눈 내리는 날의 장면이 좋다고 느꼈던 사진은 미국 사진작가 사울 레이터의 작품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는 거리 위로 찍힌 수많은 발자국과 빨간 우산을 든 사람. 간결하면서 강렬한 장면은 보는 순간 뇌리에 박혔다. 그때부터 거리 사진에 꽂혔고, 매년 눈 내리는 날의 분위기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요즘도 눈만 내리면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헤맨다. 어렸을 때와는 그 두근거림이 조금은 다르지만 나이가 들어 손발이 시린 겨울을 기다리는 유일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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