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가 앗아간 반가움
산책을 하다가 '초 특가 할인+ VIP 등급 확정'이라고 써진 헬스장 광고판을 보았다. 오호? 하고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맨 아래 '선착순 30명'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지만, 늦게 광고판을 본 자는 할인은 물론 등급까지 낮다는게 못내 아쉽다.
그러고 보면 예부터 우리나라는 순서 정하기를 참 좋아한다. 선착순 문화는 물론 차례나 장례를 지내는데도 순서가 중요하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며 물에도 위아래를 매기지 않았던가.
그중 영향력이 가장 큰 순서는 나이다. 서양 사람들에게 나이는 혈액형쯤이지만 우리에게는 혈액이나 다름없다. 나이에 따라 취해야 하는 행동 양식이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문화적 규율의 시발점이다. '나이 순서' 덕에 예의를 지켜야 하는 사람과 덕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이 정해진다. 가는 세월을 막을 순 없지만, 흐르는 시간을 가두어 순서를 매기는 조상들의 의지를 알만하다.
얼마 전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외국인들의 우리나라 여행기를 보았다. 인도, 이탈리아, 멕시코 사람들의 서울 여행기였다. 랜덤으로 방 키를 뽑아 함께 머무를 사람들을 고르는 장면이었는데, 꽤나 심각해 보였다. 폭탄 제거를 위해 전선의 색을 고를 때만큼이나 진중했다. 하긴, 친구와 써도 불편한 방을 모르는 사람과 함께 써야 한다니, 그것도 낯선 나라에서.
모두는 멕시코 친구들과 합방하고 싶지 않아했다. 그들은 아침 6시부터 여행 일정을 시작한다며 "존경스럽지만 그렇게 살지 않을래요"하고 말했다. 이윽고 방 키 하나를 뽑아 무거운 걸음을 뗐다. 두근 거리는 심장을 쥐며 이탈리아 여행객이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수염이 가득한 인도 사람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환호했다. 멕시코와 함께 방을 쓰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고, 유난히 반가워서였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한 평생을 따로 살던 낯선 남정네들은 서로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얼싸안으며 말했다. "어이~ 정말 반가워!"
그 장면이 무척 낯설었다. 우리에겐 없는 장면이었다. 처음 만난 남자들이 "어이~ 반가워!" 하고 말한다? 그리고 얼싸안는다? 글쎄.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과 해야 할 일이 아주 많다. 정중하게 인사를 해야 하고, 이름과 간단한 신상을 밝혀야 한다. 그리곤 곧바로 나이를 확인한 뒤 행위의 방향을 결정 지어야 한다. 설령 '우리나라의 나이 문화는 정말 지긋지긋해'하는 사람마저도 위의 순서를 따른다.
그러니 몇 단계를 건너뛰고, 존댓말 없이 얼싸안는 그들의 친화력을 당해낼 수가 없다. 우리의 문화는 소중하고, 나름의 이유와 장점이 있다. 그러니 찬물에도 위아래를 가리며 누군가에게 인사하고 예의를 지킨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그들의 인사가 머릿속에 기억 남는 이유는 무언가 비었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한 허전함일까.
꽉 채워진 순서와 과정 사이에서 부재를 떠올린다. 물론 내일 누군가를 만나면, 정중하게 인사하고 급히 얼싸안는 일은 없을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