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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현 Oct 24. 2022

너희들이 내 우주야

 가을이다. 가을이 된 지 얼마 안 됐지만, 벌써 춥다. 분명 10년 전만 해도 가을이 되면 날은 선선하고 하늘은 높았으며, 말도 살찌고 나도 살찌는 그런 계절이었다. 날씨가 완벽한데 어찌 집에만 있을 수 있냐며 무지막지하게 떠돌며 먹어댄 탓이었다. 한데 요즘은 가을이 마치 주말 같다. 올 때까지는 한참 걸리는데 막상 오면 금세 지나간다. 가을보다는 유사 겨울 같아서 종종 나는 가을을 겨을 정도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가을은 좋다. 무더위가 갔으니까, 아직 손이 시릴 정도로 춥지도 않으니까. 거대해진 뱃살을 긴팔로 가릴 수 있는 시작점이니까. 그런 계절은 역시 가을이라고 불러야 제맛이다.


  3년 전 10월이었다. 러닝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이때만큼 좋은 시기도 없다. 한여름보다 적어도 1km는 쉽게 더 뛸 수 있고 잘 지치지도 않는다. 시원한 바람은 땀을 가볍게 날려준다. 습습후후, 호흡하기도 적당한 습도다. 고작 3km쯤 뒤는 주제에 뭔 아는 척이냐 싶어 부끄럽지만, 왜 미식가가 아니어도 삼겹살집 정도는 추천할 수 있지 않는가.

 그날도 밤 12시쯤 뛰기 위해 집 앞으로 슬슬 걸어 나왔다. 청청한 가을밤이라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뛰기 전에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어떤 노래를 들으면 좋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마침 헤이즈의 신곡이 보였다. 제목은 <만추>였다. 늦은 가을이라니! 딱 시즌에 맞춰 노래를 낸 모양이었다. 고민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둔두두둥, 드럼 소리와 함께 노래가 시작됐다. 비트에 맞춰 나의 발구름도 시작했다.

 나는 첫 소절을 듣자마자 쾌재를 불렀다. ‘뭐야 이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가을 노래잖아’. 가사는 쓸쓸한데, 노래는 적당히 흥이 났고, 비트에서는 가을 향이 넘쳐흘렀다. 그랬다. 노래는 가을 그 자체였다. 노래를 들으며 뛰자니 기울게 뜬 달도, 달빛에 빛나는 강변도 모두 낭만적이었다. 나는 평소보다 두 배나 더 오래 뛰었다.

 그날의 기억 때문일까. 가을만 되면 헤이즈가 생각난다. 강산이 변하고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을 혁신적으로 바꾸어도 생일 축하 노래는 ‘해피 벌스 데이 투 유’ 인 것처럼 내게는 가을 노래가 그렇다. 이렇게 몇 년이 흐르니 이제는 반대로 헤이즈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을이 생각난다. 헤이즈가 가을이고, 가을이 헤이즈가 된 것이다. 상징이 만들어지니 그 짧은 가을도 조금 더 길게 느껴졌다. 



 얼마 전 정말 좋아하는 제자들이 천문대 수업을 졸업했다. 아연, 우진, 연성. 아이들은 무려 4년이나 천문대에 다녔다. 아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천문대에 왔고, 올 때마다 비 온 뒤의 옥수수처럼 무럭무럭 자라 있었다. 부모가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 쪼그마한 생명체가 도대체 언제 크려나’ 염려하는 것과는 영 다른 입장인 것이다. 동시에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이 잠깐의 지체도 없이 쑥쑥 커버리는 게 아쉬운 부모의 심정을 잠깐 느꼈다.

 아이들은 평생을 서울에서 살았지만 순박했다. 편견 없이 우주를 좋아했고 아이들을 가르친 나 또한 계산 없이 좋아해 줬다. 특히나 고마웠던 건 갑작스레 날아드는 아이들의 문자 세례다. 띠링. 아연이는 시시 때때로 사진을 찍어 보내며 본인의 우주를 내게 보냈다.


“쌤! 이거 보세요~ 가로등 같지만 달이랍니다!”

“과학관에 왔는데 우리의 갈갈이(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줄임말) 아저씨가 있네요!”

“할머니 댁 가면서 찍은 멋진 구름이에요!”


 대머리 갈릴레이를 만나도, 기울게 뜬 상현달을 마주쳐도, 멋진 천체 사진을 만나도 아연이는 내게 문자를 했다. 우진이도, 연성이도 어디선가 우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면 문자를 보냈다.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을 쏘는데 12조 원이 들었데요”

“쌤! 별 보러 왔는데 쌤이랑 다시 오고 싶어요!”.


  나의 답장은 간결했다. "우와 정말 멋진데!?" , "고마워! 덕분에 선생님도 재미난 사실을 알게 되었네!". 길게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우주는 이미 쌓인 지식과 한계로 테두리가 있는 반면 아이들의 우주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내 메시지로 어떠한 편견도 주면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우주는 언제나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있다. 그런 설레는 우주를 만날 때마다 제자들은 내게 문자를 보낸 것이다.

 세상에. 우주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나라니, 가히 영광이다. 평생 별을 좋아하고 아이들을 사랑한 보람을 느낀다. 헤이즈를 보며 가을을 떠올리는 사람과 별을 보면 나를 떠올리는 아이들이 같은 우주에 산다.  우주엔 갈색 낙엽으로 물든 시적인 가을이 녹아있고, 밤하늘의 별은 끝없이 영롱하다. 그런 우주 속에서 나를 찾는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쌤은 천문학도 좋아하고 가을도 사랑하지만 너희가 제일이야. 너희들이  우주야.


 나의 우주는 아이들과 함께 있다. 아이들이 우주고, 우주가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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