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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앰버 Oct 09. 2023

많이 웃고 많이 사랑하자고

지난 해 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지금도 이 헤어짐을 생각하면 울음이 난다.


18년 전쯤 뇌졸증으로 오른팔에 마비가 오고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도맡아하시던 큰아들네 살림, 손주손녀 육아, 산책 모두 못하게 되고

집안에 갇힌 듯 답답한 삶을 사셔야 했다.


게다가 몇년 뒤 외할머니의 큰아들이자 나의 외삼촌이 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먼저 떠나면서

큰 상심으로 우울해하셨다.


게다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된 건 코로나19 감염 이후 찾아온 합병증.

워낙 노인이시라 치료를 위해 전담병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겪은 공포가 착란까지 불러와 

퇴원 이후에는 가족들을 힘들게 하시기도 했다고 들었다. 


돌아가시기 전 딱 일주일 전 찾아뵈려했지만 

간병 중이던 엄마가 만류하여 나중으로 미뤘던 것이 큰 후회가 되었다.

할머니가 떠나고 나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당신의 사남매가 낳은 첫 손주였던 나를 두고 

'세상에 손주라곤 저 혼자 본 사람처럼' 행복해했다던 우리 할머니 얘기를 

빈소에 찾아오신 이모할머니한테 듣고는 웃으면서 울었다.


할머니가 그만큼 나를 사랑했다고 말한 적 없지만 나는 언제나 알고있었던 것 같다.


그런 할머니에 대해 아는 이야기는 따로 남길 것이다.




외할머니가 이별을 통해 나에게 남긴 교훈이 있어 언제나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오늘 남겨본다.


할머니가 떠나고 빈소를 지킨 건 할머니의 남은 자녀 셋, 그 자녀들의 배우자 셋, 그리고 손자 넷이었다.

조문객을 맞는 정신없는 중에도 가족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나 역시 가까이 지내던 사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근황도 업데이트하고, 할머니와의 시간을 겹쳐보기도 하고.


할머니의 사남매와 그 가족들은 대개 사이가 좋았지만 사건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 묵은 감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건 자신들의 어머니와의 이별 앞에 내려놓고 서로 쉴 수 있게 배려하고 챙기고 있었다.


발인 후 화장장에서는 가족들이 할머니의 사진을 찾아보며 할머니와의 시간을 돌이켜봤다.

뭣하러 찍느냐는 호통에도 '그냥 새 카메라 샀으니까!'하고 무심하게 찍어 보관해둔 사진 한장이 고마울 정도로 할머니의 흔적이 적었다. 


그렇지만 게중에 내가 사촌에게 보낸 생일선물을 할머니가 대신 안고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그 속의 할머니는 백발에 꼬부랑한데도 상관없이 귀여워서 장지 근처 시장에서 얼른 인화해다가 수목장하는 나무에 걸어두고 비석이 도착할 때까지 할머니가 여기 계시다고 표시하는데 쓰기도 했다.


그렇게 외할머니를 60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함께 선산의 나무 아래 모시고 

가족들과 작은 상을 차려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 곳에서 헤어졌다. 경기도로, 강원도로, 서울로.


그렇게 2박 3일을 할머니가 만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그 시간 내내 추모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서로 식사도 챙기고, 농담도 하고, 장난도 쳤다.


문득 안닮은 듯 닮은 이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생각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이 모습 자체가

할머니가 우리 모두에게 남긴 선물같았다.

 

할머니가 9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어른으로서 자리를 지켜 가끔 모이게 할때는 

그냥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었다. 의미도 모르고 이 가족을 만났다.


하지만 이유없이 걱정하고 챙기고 또 가끔 싸우고 미워하고 피해를 주기도 하는 이 사람들이 

할머니가 그토록 고생하며 지켜왔던 '가족'이라는 걸 장례를 치르는 그 며칠동안 깨닫게 해준 것 같았다. 


이렇게 다들 자라 본인의 가족을 만들고 또 그들이 모여 더 큰 울타리가 되는 긴 시간, 

할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혹시 그 감정을 다 느끼고 가셨을까.

나는 이 헤어짐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어렴풋이 본거 같은데, 그 잠깐이라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당신의 가족이 커지는 시간이 할머니에게도 행복이었기를.

나에게 이렇게 큰 가족을 만들어준 외할머니가 이제는 평안하시기를.

외할아버지와 외삼촌과 함께.




인간이 죽음이라는 예정된 이별을 앞에 두고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남겨진 사람들이 덜 슬프고 마음 아프고 그를 두고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죽음 뒤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모여 나를 두고 괴로워할거라 생각이 든다면,

떠나는 나의 마음이 미리 편치 않다.


나는 분명 이 생에서 즐거웠고 행복했고 또 충분히 사랑했다고, 많이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리면 또 어쩐단 말인가.


평소에 즐겁다고, 행복하다고,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하는 수 밖엔 없다.

그러려면 정말 그렇게 느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엔 힘든 일이 있지만, 아니 많지만,

그 일들이 나의 삶을 망치고 부수고 파괴하지 않도록


충분히 그리고 철저하게 많이 웃고 세상과 눈 마주칠 회복력을 만들어놓아야 한다.

어쩌다 힘든 날에도 불행하지 않도록 즐겁고 행복한 감각을 살려두어야 한다. 


내 안의 웃음이, 체력이 고갈되지 않도록 매일 행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내 생각을 다 설명할 길이 없어서,

직장 내 인간관계로 힘들다는 친구한테 '그냥 맛있는거 많이 먹고 웃긴거 많이 봐' 하고 말았다.

다시 생각하면 무척이나 불친절한 위로였을 것 같다.


날 위로해주는 친구에게는 '웃긴 영상이나 많이 보내줘~'하고 싱거운 소리를 했다.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외할머니와의 헤어짐은 아직도 슬프고 나는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오늘도 울고있지만

할머니와 관련된 모든 기억들이 감사하다.


한번은 꼭 감사했다고 덕분에 이렇게 잘 자랐다고 얘기하고 싶은데, 사실은 다 헤어진 후에 생각난 말이다.

그렇지만 진심이라 꼭 한번은 어디에든 얘기하고 싶었다.


할머니, 사랑해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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