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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식과 태도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물음.

[넘버링 무비 25] 영화 <쇼잉 업>

by 조영준 Mar 27. 2025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5년 1월 20일자로 작성되었습니다. (기사로도 송고되었으나 제목은 다를 수 있습니다.)


01.

국내에 정식으로 개봉한 영화는 <퍼스트 카우>(2021)였지만, 이전부터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다작을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각각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단일한 성향과 문법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감독에 대한 다양한 글 속에서 ‘정적(quite, stillness)’이라는 단어적 표현을 찾아보게 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반려견과 함께 미 대륙을 횡단하던 <웬디와 루시>(2008)에서도 그랬고, 또 다른 작품 <어떤 여자들>(2016)에서 인물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퍼스트 카우> 속 쿠키와 킹 루가 보여줬던 우정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감독의 스타일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미묘한 경계 위에서 미니멀하고 과묵한 태도로 어느 지점에서도 인위적인 힘을 가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이 영화 <쇼잉 업>(2025)을 떠올려봐도 그렇다. 곧 전시를 앞둔 조각가 리지(미셸 윌리엄스 분)의 삶을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유난스럽지 않다. 한 예술가의 삶이나 그 주변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 풍자나 비판을 담고자 한다거나 극적인 드라마를 개입시키려는 모습, 심지어는 해체의 과정을 통해 현학적인 표현 방식을 이끌어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다. 런닝 타임 내내 차분하면서도 균등한 에너지가 스크린 위로 흘러들어왔다 나간다. (몇 차례 연기적으로 인물의 감정이 다소 고조되는 지점이 있기는 하나, 그런 장면에서조차 영화 전체의 톤은 변하지 않는다.) 역시, 그동안의 작품에서 보여줬던 방식과 닮아있다.


02.

“죽더라도 딴 데 가서 죽으렴.”


영화 <쇼잉 업>은 조각가 리지가 전시를 열기까지 일주일 남짓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엄마 진(메리앤 프런켓 분)을 도와 학교의 행정 업무까지 담당하는 그녀가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절된 시간과 공간. 전시가 열리는 날까지만이라도 오롯이 전시 준비에 몰입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이지만, 삶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2주째 온수가 나오지 않는 일상의 문제부터, 반려묘 리키의 끼니를 챙겨주는 일,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 집을 공유하며 이해할 수 없는 노년을 보내는 아버지라는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마음을 바깥으로 써야 하는 상황들이 끊임없이 차고 들어온다.


어느 날 밤, 반려묘 리키가 집 안으로 들어온 비둘기를 해치던 장면을 발견한 후에 구조한 비둘기를 창밖으로 던져버리는 장면은 해당 인물이 외부적 상황 혹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로부터 얼마나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지점이다. 행위 직후, 자신을 쓰레기라고 자책하는 모습이나 이후의 장면에서 돌봄의 주체도 아닌 상황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쏟고자 하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타고난 성품이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존재를 자신의 시야로부터 치워내고 싶은 강한 심리가 이 행동 하나로부터 읽힌다. 아마도 예술가의 잔잔한 물 아래에 놓인 치열함과 불안의 발현일 것이다.



03.

집주인이자 동료 작가인 조(홍 차우 분)는 리지의 영역을 사사건건 침범해 오는 또 하나의 인물이자 문제다. 갖은 핑계를 늘어놓으며 온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아 일상을 무너뜨리는가 하면, 하필이면 간밤 리지가 창밖으로 내던진 비둘기를 데려와 삶 속으로 밀어 넣는다. (구조 행위 자체는 분명 문제가 아니다. 피하고 싶었던 상황을 리지의 인생 속에 굳이 다시 밀어 넣는 행위가 못마땅하게 여겨질 뿐이다.) 심지어 그는 주변에서 재능까지 인정받는 듯 보인다. 이번에도 하필이면, 조의 리지의 전시가 연이어 계획되어 있다. 분명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리지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일들이다. 무시하려면 할 수 있지만,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것들이다.


가족의 삶을 돌보기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 빌(주드 허쉬 분)이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오빠 숀(존 마가로 분)의 삶을 보살펴야 하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멀리 떨어져 있기라도 하면 서로 모른 척 지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마치 자신의 집처럼 빌의 집을 점령하고 있는 리(맷 말로이 분), 도로시(아만다 플러머 분)는 물론, 땅이 예술을 말해줄 것이라며 뒷마당에 커다란 구멍을 여럿 만드는 오빠도 전시를 앞둔 그의 입장에서는 일상을 침습해 오는 장면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 하나는, 과연 그렇게 침범해 오는 것들에는 리지가 보여주는 태도가 담겨있는가, 엿보이는가 하는 문제다. 


04.

리지에게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자신이 경험하는 부정적인 경험 혹은 신경 쓰이는 일들을 누구와도 쉽게 나누지 않는다. 내면에 쌓이고 있을 무형의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거나 분출할만한 소소한 장면이 영화 전체에 걸쳐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중후반부를 지나면서 겨우 한번, 조의 핸드폰에 음성 메시지를 남기며 감정을 강하게 표출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 또한 엄밀히 바라보자면 감정의 표출보다는 둑의 붕괴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그는 학교 가마 일을 돕는 에릭(안드레 벤자민 분)이 자신의 작품을 그을리게 만드는 순간에도 침착한 모습이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전시에 출품해야 하는 작품인데도.


영화에서 타자와 자신 사이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분명 리지다. 겉으로는 상황적으로 어쩔 수없이 내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분명한 개인적 선택의 결과에 해당한다. 벗어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서 있어야만 하기에 택한 위치다. 앞서 이야기했던 ‘그렇게 침범해 오는 것들’에는 리지가 보여주는 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인생 주기 위에서 이제 그런 시기를 지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빌), 타인의 상황을 고려할 만큼 자신의 상태가 안정적이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숀). 또 외부의 그 어떤 상황보다 자신의 현실을 더 중요한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에도 가능한 일이다 (조). 모두 자신의 무언가를 위해 ‘우리의 장력’으로부터는 벗어나고자 한다.



05.

“그렇다고 하루가 돌아오지는 않지.”


그를 바라보는 태도에 ‘버틴다’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카메라가 훑어내는 작업물 모두를 떠올려보자. 벽 위에 붙은 수많은 그림과 그 앞에서 작업에 몰구하고 있는 리지의 모습에서는 집중과 열정, 단정함과 같은 모습이 엿보이는 듯하다. 수면 아래의 불안이나 치열함과는 또 다른 면모일 것이다. 이 장면을 바라보는 시선과 인물 자체를 바라보는 태도는 유사 혹은 동일할 필요가 있다. 오랜 시간 반복을 통해 작업을 이어왔을 창작자로서의 시간만큼이나 그의 일상 시간 또한 그렇게 (의식하지 못한 상태의) 반복을 통해 갈무리되어 왔을 것이다. 지금의 행동으로 인해 무엇을 빼앗기고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이성적인 판단에서 벗어난 범주의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시간과 하루는 어디에서도 되돌려받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밖에 없는 일이 누구에게나 있다.


다시 말해, 이 영화 <쇼잉 업>은 어떤 창작자가 자신의 예술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현실의 문제들을 마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한 인물이 살아가는 방식을 그려내고 있는 이야기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감독이, 카메라가 보여주고 싶은 인물로 리지가 선정된 이유에 전자의 목적이 닿게 되는 것이다. 이는 영화가 런닝 타임 내내 인물이 완성한 작품에 대해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않는 이유와도 맞닿는다. 관객들은 이와 같은 결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과정 속에서도 방향성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06.

“전시 준비 과정을 다 지켜봤잖아.”


지금까지 이 글에서는 반려묘에 의해 다친 비둘기를 한 인물의 경계를 동의도 없이 파고드는, 일종의 잡음처럼 여기며 표현했다. 영화에서도 처음에는 그런 존재로 그려진다. 모든 장면이 레이어처럼 서로를 껴안고 난 다음에는 조금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처음 다친 위치가 날개였다는 점과 마지막 장면을 통해 하늘 높이 날아갈 수 있게 된다는 점, 그리고 그 두 장면 사이에 리지가 놓인다는 것을 모두 고려할 수 있게 된 후다. 무엇이 생명을 회복할 수 있게 만들었고, 또 내일로 다시 나아갈 수 있게 했나.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모든 문제적 상황을 딛고 한 공간에서 어울릴 수 있게 된 모든 인물과 관계에도 통용된다.


보이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그려지는, 끊어지지 않고 내내 연결되어 있던 인생과 예술 사이의 가는 실 한 다발이 이 작품 속에 있다. 매일을 살아간다는 일,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을 완성해 나가는 것 또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전시된 조각(인생) 하나가 얼마나 그을리지 않고 완성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과 태도로 그 작업을 계속해서 이어왔는지가 중요한 것이라고 이 영화 <쇼잉 업>이 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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