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할 나이가 되면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다고 했는데, 그 이유에서 일까. 어느 나이가 되니, 아이들에게 눈길이 머무르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아마도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이, 선배와 후배들이 가정을 꾸리고, 의젓한 부모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은데, 익숙한 친구의 얼굴을 닮은 아이가 어찌나 예쁜지. 나조차 아이의 천진한 미소에 마음이 녹을 때가 많았다. 그때 깨달았다. 예쁘지 않은 아이가 없구나.
짙은 쌍꺼풀, 커다란 눈과 오뚝한 콧날, 날렵한 브이라인 같이, 우리가 흔하게 어른들의 외모를 칭찬할 때 쓰는 말들이 아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이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사랑스럽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가끔은 나에게도 잔뜩 찡그린 얼굴 조차 어여쁜 아이였을 때가 있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곤 했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모두 사랑스러웠던 아이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 더 이해할 수가 없지.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폭력이라니. 이 작은 아이의 어디를 때린다는 말인지. 16개월 난 정인이에게 췌장이 파열될 정도로 폭력을 가한, 악마보다 더 한 양부모, 세 번이나 신고를 받고도 부모로부터 아이를 분리시키지 않은 경찰과 아동학대 관찰 기관 담당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범죄와 방관, 직무유기에 대한 분노는 정인이의 이야기를 접한 누구든지 느낄 수 있을 테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예전부터 내가 느꼈던 불편함, 부모와 아이를 호혜관계로 파악하는 인식에 대한 것이다. 흔하게 하는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같은 말이나, 혹은 드라마에서 자주 들을 법한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내가 너를 키우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와 같은 말을 들으면 그렇게 이상할 수가 없었다. 누가 낳아달라고 했나! 부모는 누구의 부탁과 요청으로 아이를 낳았나?
배은망덕한 자식이 효를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가 그렇다. 이 세상의 어떤 아이도 자기 의지로 태어나지 않는다. 아이는 부모의 이기심으로 세상에 태어나는데, 부모는 왜 키워준 공을 인정받고 싶어하며, 그에 대한 치사를 바라는지. 애초에 아이를 보호하고 양육해야 하는 의무는 부모에게 있다. 부모가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지, 자랑도 생색낼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러니, 책임을 다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부모가 돼서는 안 된다. 자식의 도리 이전에 부모의 책임이 있다. 양육의 어려움, 생의 고단함, 그 어떤 것도 아이에게 전가되서는 안 될 일이다. 아이는 무조건적인 보호와 사랑의 대상이지, 은혜를 갚아야 하는 까치가 아니다.
요즘 시대엔 아이를 낳으려고/라고 만하지, 부모와 그 책임에 대한 숙고가 없다. 부모 자격시험이라도 생겨야 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