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한마을의 추억
1 능이, 2 표고, 3 송이라는 말이 있다. 버섯의 맛을 평가하는 순서다. 송이가 워낙 비싸다 보니 1송이 아니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능이를 버섯 중에 제1로 친다. 먹어 본 사람이라면 다 인정하는 얘기다.
70년대 후반 송이를 유독 좋아하는 일본인들로 인해 수출길이 열리면서 송이는 귀한 대접을 받게 된다. 그 전까지는 능이나 송이도 그저 먹을 수 있는 버섯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송이가 비쌀 때는 kg당 100만원이 넘기도 하니 제일 맛 좋은 송이라 여길 수밖에.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송이에 비해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능이를 더 좋아한다. 쫄깃한 맛과 독특한 향만으로도 송이보다는 한 수 위니까.
오늘, 난생 처음 능이버섯을 내 손으로 땄다. 그것도 취재를 위해 산을 오르다 아주 우연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완전, 땡잡은 날이다. 배낭 안에 다 들어가지도 못할 만큼 꽤 많은 양이다. 사실 산골에 살 만큼 살았다고 하는 사람이 능이를 처음 땄다면 체면이 좀 구겨지는 일이지만, 왠지 남의 것을 탐내는 기분이 들어 버섯철이면 버섯이 많이 난다고 알려진 산에는 일부러 가지 않았다. 더구나 송이나 능이는 한 철이라 지역주민들에게는 큰 소득원이기 때문이다. 송이를 내 손으로 직접 따 본 것도 딱 두 번 뿐이다. 그것도 강원도에서만. 대신 맛 볼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있다. 마을 순두부집 아저씨 덕분인데, 송이철이면 어김없이 몇 개 놓고 가신다.
아무튼 우연찮게 능이를 발견했으니 욕심이 생긴다. 참나무 숲에서 주로 자라는 능이는 눈 앞에 있어도 잘 보이지 않는다. 낙엽과 버섯을 구분하기 힘들 만큼 동색인 데다가 낙엽 속에 숨어 있어 ‘여기 있다’라고 해도 못 찾는 경우도 있다. 이왕 능이 구경을 했으니 좀더 따고 싶은 마음에 처음 능이를 발견한 근처를 맴돌았지만, 소득은 없었다. 역시 욕심이었다. 마저 취재를 위해 사진을 찍고 마을로 내려서다 마침 주민을 만났다.
"버섯 많이 따셨어요?"했더니 바로 보여주신다. 배낭이 아니라 쌀자루에 한가득이다.
“딱 지금 아니면 1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다니는데, 예년만 못해요. 외지 사람들이 하도 산을 쑤시고 다녀서....”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갑자기 뜨끔해진다. 그렇다고 고백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것도 평생 처음 능이버섯을 딴 날인데...
“많이 날 때는 아침에 한번, 낮에 한번, 그리고 느지막이 또 한번, 하루 세 번은 오는데 올해는 예년만 못하네요”
산에서 만난 아저씨를 따라 마을로 들어섰다. 무주에서는 오지로 소문난 벌한마을이다. 몇 번 다녀 간 적이 있어 친숙하다. 고샅은 오래된 돌담들로 이어져 아름답다. 낡은 토담은 반쯤 허물어져 세월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마을은 조금씩 변해 가고 있다. 집성촌이라 외지인들이 터 잡기 힘든 곳으로 알려졌던 이곳도 전원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벌한마을의 지형은 독특하다. 그 독특한 지형을 지명으로 이어 받았다. 칠 벌(伐), 찰 한(寒), 즉 추위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마을은 북향이지만, 집성촌을 이루고 살 만큼 그 역사가 오래됐다. 임진왜란 당시 피난 왔던 성산 배(裵)씨가 그 시조다. 벌한이란 지명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거칠봉과 사선암에서 유래했다. 마을 주민들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북향 마을을 거칠봉(居七峰)의 일곱 신선과 사선암(四仙岩)의 네 신선이 보호하고 있어 추위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남향 못지 않게 볕이 잘 들고 오래 머물러 마을을 처음 방문한 사람이라면 북향인지를 모를 정도라고 한다. 긴 골짜기는 협착(狹窄)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분지형 지형으로 논과 밭이 충분할 만큼 펼쳐져 있다. 기온이 따뜻하고 바람을 타지 않는 곳에만 된다는 토종벌도 이곳에서는 잘 된다고 하니 참으로 감탄스러운 조상들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마을을 한바퀴 둘러본 후 아저씨와 함께 그의 집을 찾았다. 마침 아들이 산에서 따 온 야생 오미자로 효소를 담그고 있던 권영순 할머니가 자리를 내 주신다.
“아들 덕분에 요새 능이 맛 제대로 보네. 나이가 드니까 힘에 부쳐서 나는 산에 못 가거든....”
맛 한번 보라며 데친 능이버섯을 내 오신다. 초장에 찍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다섯 가지 맛이 난다는 시원한 오미자 효소차도 함께 내오신다. 낯선 방문객이지만 '아들이 데려온 손님이니 그냥 보낼 수 있나' 하시면서. 그러시고는 덤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신다.
“내 고향은 읍내거든. 그땐 이런 산골로 시집올 줄 누가 알았나. 집안 어른들이 다 알아서 했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말도 마. 갓난쟁이를 등에 업고 사선암 고개를 원 없이 넘어 다녔어. 그땐 차가 없었잖아. 지금이야 차 타고 읍내로 장 보러 다니지만, 그땐 무풍까지 장 보러 다녔거든.”
산 좀 탄다는 내가 다녀와도 6시간은 걸리는 거리를 업고 이고 지고 다녔다니, 감히 상상이 안 가는 그림이다. 깻잎 장아찌를 만들기 위해 한 장 한 장을 고르는 모습이 마치 내 어머니의 모습과 같다. ‘내 올 만한 게 뭐 더 없나’ 하시면서 복숭아에 팩우유까지 내오신다. 할머니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내 손을 잡으시고는 ‘살아온’ 얘기들을 이어간다.
“옛날에야 이런 버섯도 배고파서 먹었지만, 도시 사람들은 없어서 못 먹는 귀한 것들을 요즘은 몸 생각해서 먹곤 해. 그러고 보니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서 살 만해. 배 고픈 걱정 안 하는 것만도 어딘데.... 무주에서는 제일 산골이라는 여기서도 전화 한 통이면 다 해결되니까”
할머니는 밤이라도 샐 기세다. 일부러라도 찾아다니면서 들어야 하는 귀한 말씀들 아닌가. 할머니 말씀이 벌한마을의 문화이고 역사인 셈이다.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 많아 아쉬울 뿐이다. 벌한마을을 처음 찾은 것은 10여 년 전이다. 그때 만난 어르신은 돌아가시고, 300년은 됐을 거라고 했던 어르신 집터에는 근사한 새집이 들어서 있다.
귀한 음식에, 좋은 말씀까지 받은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선다. 지인에게 선물할 마음에 할머니의 아들이 금방 따 온 능이 버섯을 4kg 샀다. 할머니는 ‘장사도 덤이라는 게 있지’하시면서 야생 오미자를 한 봉지 건네주신다. 버섯과 오미자로 가득 찬 배낭을 짊어맨 어깨는 묵직하지만, 발걸음은 가볍다.
고샅을 돌아나오는데, 담배건조막이 하나 눈에 들어 온다. 10년 전에는 집집마다 하나씩은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 뿐이다. 벌한마을에 하나둘 새 집이 들어서는 것을 보니 아마 벌한 마을이 간직한 옛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나’도 변하고, '세상'이 다 변하는데, 벌한마을만 그대로 있으라고 한다면 안 되겠지. 지금 이 그림 그대로를 눈으로 새겨 가슴 한구석에 저장을 했다. 때때로 꺼내보고 싶어서.
차에 오르자마자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2008년 5월. 뜬금없이, 서창마을 황토펜션 주인이 되었다.
지금은 펜션 주인이 아닌, 한 사람의 여행자로 여전히 서창마을에 살고 있다.
이 글은 그간의 기록이다.